커크 더글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7번째 줄:
 
== 생애 ==
그는 [[러시아 제국|제정 러시아]] (현 [[벨라루스|벨로루시]] 고멜) 유대계 이민자인 다니엘로비치 부부의 아들로 "이수르 다니엘로비치"라는 이름을 가지고 [[미국]] [[뉴욕뉴욕주]] [[암스테르담 (뉴욕주)|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먼저 이민을 간 형제가 신원 보증인이 되어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 형제가 사용하고 있던 "뎀스키"라는 성을 본받아 사용했는데 커크도 "이지 뎀스키"라는 이름으로 자랐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에 들어가면서 현재의 이름인 커크 더글러스로 개명한다.
 
빈민가에 살면서 생계를 위해 어린 시절 신문 배달부터 노점상, 정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학업에 힘썼다. 학비 대출을 이용하여 [[세인트 로렌스 대학교]]로 진학하여, 학비를 벌기 위해 정원사, 경비원 등으로 일을 했다. 그는 뛰어난 레슬링 선수였으며, 사육제 때는 돈을 벌기 위해 여름동안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꿈은 연기자가 되는 것이라고 새삼 인식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934년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드라마틱 아츠에 입학하여, 그 재능을 꽃피워 특별 장학생이 되었다. 이때 클래스메이트였던 [[로렌 바콜]]은 이후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징병되어 그대로 [[제2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에 종군했다가 [[1944년]]에1944년에 부상 때문에 제대했다.
 
1941년 졸업 공연으로 진행된 《봄이여 다시》(''Spring Again'')에서 노래하는 메신저 소년을 연기하며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제대 후 뉴욕에서 라디오를 중심으로 하는 일에 종사하고 무대에도 출연했지만, 로렌 바콜의 추천으로 [[1946년]] 영화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체호프|체홉]]의 《세 자매》에서 안드레이 역으로 출연했고, 더글러스는 무대를 할리우드로 옮겨 활약한다. 이후 강한 이미지를 남긴 여덟 번째 출연작 《[[챔피언 (1949년 영화)|챔피언]]》 이후로, 처음에는 내성적인 성격 배우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전사》는 [[아카데미상아카데미 편집상]] 편집상과[[골든 골든글로브글로브상]] 촬영상을 수상했거수상했고, 커크 본인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서부 영화 《죽음의 모래》(Along the Great Divide)'에 출연해 일약 스타덤으로 등극했다.
 
그 후, [[1955년]]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독립 프로덕션 '브라이나 컴퍼니'을 세웠고, [[1960년]] 자신이 주연하고, 제작, 총지휘를 맡아 제작비 1200만 달러의 대작 《[[스파르타쿠스 (영화)|스파르타쿠스]]》를 만들었다.
 
진지한 역할이 어울리는 이미지 외에 《[[해저 2만리 (1954년 영화)|해저 2만리]]》에서 보여준 가벼운 연기와 창세기의 TV 프로그램 ‘잭 베니 프로그램’으로 뮤지컬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73년]] 서부 영화 '내일없는 추격'에서 메가폰을 맡아하면서 주연을 맡았지만, 서부극 자체가 쇠퇴기에 있었기 때문에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한 같은 해 TV 뮤지컬 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작곡 : 라이오넬 바트)에 주연을 했다.
 
== 사생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