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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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따옴표크기=40px}}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 혁명|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 (1919년)|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막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ref name=autogenerated2>[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3&aid=0000007473 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주간경향 [[2005년]] [[11월 4일]] 2011-10-25 확인</ref>
 
하지만,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거사 전 행동과 미국의 기록을 볼 때 민주주의에 생각이 많은 자라 볼 수 있어 김재규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출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4월 4일 (일) 제 78 회 ▣ 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 “장준하-김재규 '거사' 밀약 했다” | 일요신문 ]
 
=== 우발적 범죄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