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대한민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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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처음 에는 국회가 경복궁 조선총독부 였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폭파시키고 나서다시재건하여
만들어진것이바로👇👇
[[파일:Korea National Assembly 01.jpg|섬네일|국회의사당에서 18대 대통령 취임식 준비 모습]]
[[1966년]] [[3월]] 신축될 국회의사당 부지는 남산 [[사직단]], [[종묘]], 용산(삼각지), 말죽거리(서초 양재), 김포가두등 6개 였는데, 이중에서 결정된 신축부지는 사직공원 일대로 결정되었다. 사직단 결정은 중앙청과 가까이 있어 관아지구로 조성할 수 있다는 잇점과 3만6천여평의 대지가 확보되어 있다는 점이 적용되었다. 일부 도시계획가들은 고적을 보존할 수 없고, 행정의 기능이 너무 집중화하여 넓은 안목으로 [[서울시]] 전체 도시계획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사당 건립지시를 내렸는데, 당시 의사당은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양원제 실시에 적응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대규모 건물로 하되 국내 기술진이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 약 2년여간 이에 대한 특별한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채 흐지부지 되었다. 당시 국회는 청사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3별관에 이어 4별관까지 준공하였지만, 비서휴게실 조차 마련하지 못해 새로운 종합국회청사가 세워져야 해결된다고 꼬집었다. 당시 국회의원은 종합국회청사를 신축하자는 결의안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