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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시미쓰가 세상을 떠나고, 차츰 쇼군의 권력은 약체화되었고, 슈고 다이묘들의 대두가 현저히 진행되었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는 아버지 요시미쓰의 정치 노선을 이어받아 쇼군 권력의 강화를 행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지나친 강경책이 주변의 반발을 초래했고, 가키쓰의 난(嘉吉の乱)으로 암살당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쇼군 권력의 쇠퇴와 권위의 실추만 드러낸 결과를 낳았다. 이어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시대에는 후계 문제 등을 놓고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생하여,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만을 지배하는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는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에 의해 쇼군에서 쫓겨났고(쫓겨났다. 이를 역사에서는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이라고 부르며, 메이오 정변 이후의 쇼군들은 실권을 빼앗긴 이름뿐인 존재가 되어, 유력 다이묘(大名)들의 지지 없이는 쇼군의 지위도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그 뒤 아시카가 쇼군가에서는 쇼군의 요절 등이 잇따랐고,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의 시대에 이르러 쇼군의 권력이 다시금 부활될 조짐을 보였으나, [[에이로쿠]](永禄) 8년([[1565년]]) 5월에 미요시 산닌슈(三好三人衆) 등에 의해 요시테루가 암살되고 말았고(말았다. [[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쇼군 요시테루가 시해된 이후 쇼군은 유명무실화되었다. 한편 요시테루 암살 3년 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쇼군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는 사태가 이어졌고, 일시적으로 무로마치 막부 자체가 소멸되기도 하였다([[만도코로]] 등의 관료기구는 존재하고 있었다).
 
요시테루의 친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는 에이로쿠 11년([[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옹립되어 교토로 상경했고, 제15대 쇼군이 되었다. 이때 14대 쇼군이었던 요시히데(義栄)는 아와(阿波)로 달아났다. 그의 계통은 헤이지마 구보 가(平島公方家)라 불렸다. 이어 쇼군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와 대립하다 [[겐키]](元亀) 4년([[1573년]])에 교토에서 쫓겨나(마키시마 성 전투槇島城の戦い) [[빈고 국|빈고]](備後)로 옮겨졌고, 무로마치 막부는 종언을 맞이하였다. 한편 《공경보임》(公卿補任)에는 [[덴쇼]](天正) 16년([[1588년]]) 도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이 확립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출가하기까지 쇼군직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시아키의 아들 기진(義尋)의 아들들은 모두 승려로 출가하였고, 아시카가 쇼군가의 직계는 끊어졌다. 한편 요시아키의 아들 혹은 손자라는 전승이 있는 인물로 잇시키 요시타카(一色義喬)나 나가야마 요시아리(永山義在)가 있으나, 그 출자를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 간토 구보 가문 ==
일찍이 다카우지의 아들로 간토 지배를 위해 아버지에 의해 파견되었던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 ・ 아시카가 모토우지(足利基氏)는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간토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모토우지 사후 그 자손은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 쇼군가와 대립 ・ 항쟁을 거듭했고, 결국 4대 구보인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에 이르러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요시노리]](義教)와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역사에서 말하는 에이호의 난(永享の乱)이다. 모치우지는 이 난에서 패했고 요시노리의 명으로 자결해야 했으며, 가마쿠라 구보 가문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요시노리 사후 요시노리의 명으로 목숨을 건졌던 모치우지의 막내아들 나리우지(成氏)가 쇼군 요시마사로부터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받고, 제5대 가마쿠라 구보가 되었다. 하지만 나리우지는 [[간토 간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대립하였고 가마쿠라를 버리고 시모우사(下総)의 고가(古河)로 옮겨 고가 구보(古河公方)라 칭하였다. 나리우지 사후 고가 구보 가문은 내분이 잇따랐고, 5대 구보 아시카가 요시우지(義氏)가 덴쇼(天正) 11년([[1583년]])에 사망하면서 고가 구보 가문은 단절되었다.
 
한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생이었던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에서 비롯된 호리코시 구보 가문(堀越公方家)은 제2대 차차마루(茶々丸)의 시대에 호조 소운(北条早雲)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제2대 고가 구보인 아시카가 마사우지(足利政氏)의 둘째 아들 요시아키라(義明)에서 비롯된 고유미 구보 가문(小弓公方家)도 [[덴분]](天文) 7년([[1538년]])에 호조 우지쓰나(北条氏綱)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렇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까지 간토 아시카가 씨는 정치의 주요 무대로부터 차례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요시아키라의 손자인 구니토모(国朝)는 무로마치 막부 멸망 뒤 천하인(天下人)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간토 구보(関東公方)로써 아시카가 집안을 재흥시키는 것을 허락받았고,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딸과 결혼하여 [[시모쓰케 국|시모쓰케]](下野) 기쓰레가와(喜連川)에 영지를 하사받았다. 훗날 그는 성을 기쓰레가와 씨(喜連川氏)로 바꾸었고, 그 자손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녹고(禄高) 5000석에서 10만 석 격의 고쿠슈 다이묘(国主大名)의 대우를 받는 집안으로써 존속하였다. 이가 기쓰레가와 번(喜連川藩)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기쓰레가와 씨는 다시 아시카가 씨로 복성하였다.
 
기쓰레가와 씨 계통의 아시카가 집안은 당주가 된 아시카가 아쓰우지(足利惇氏) 사후 아쓰우지의 조카인 아시카가 고헤이(足利浩平)가 집안을 이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