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노키 마사시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2번째 줄:
 
=== 최후ㆍ미나토 강에서의 전투 ===
교토에서 밀려난 다카우지는 [[엔겐]](延元) 원년ㆍ겐무 3년([[1336년]])에 [[규슈|규슈(九州)]]에서 세력을 회복해 다시 교토로 진격해 왔다. 구스노키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모든 사회 혼란의 책임은 다름아닌 천황의 정치에 있으며, 무력을 가진 무사 계급을 통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기에는 구게(公家) 중심의 정치는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점과 그들 무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다카우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치고 다카우지와 화친할 것을 천황에게 진언했지만 천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천황에게 교토에서 잠시 철군할 것을 진언했지만 이마저도 묵살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닛타 요시사다의 휘하 장수로 출진할 것을 명받은 구스노키는 미나토 강(湊川, 지금의 일본 효고 현 고베 시)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의 군에 패했다.(미나토 강의 싸움) 이때 구스노키는 동생 구스노키 마사스에(楠木正季)와 함께 서로 찌르는 방식으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법명은 영광사대원의룡만당(靈光寺大圓義龍卍堂)이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자식으로는 후세에 아버지를 이어 '''소(小) 남공'''이라 불린 마사쓰라(正行, 구스노키 마사쓰라)를 필두로 마사토키(正時, 구스노키 마사토키)ㆍ마사노리(正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있으며, 이들도 아버지가 섬겼던 천황을 따라 남조에 가담해 다카우지와 맞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