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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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오성술'''(吳成述, 1884년 5월 15일 ~ 1910년 9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대한 제국 말기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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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거병하였다. 의병장 [[김태원 (1870년)|김태원]](金泰元)이 합진을 제의해 와 두 진영을 합치기로 결의하였다.<ref name="한국학"></ref><ref name="캐스트"></ref> 1907년 9월 [[기삼연]]을 창의대장으로 하여 편성된 호남 의병 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에도 참여하였다.<ref name="캐스트"></ref>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이 격화하자 일본 군경은 1908년 초부터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하였다.<ref name="캐스트"></ref>
1908년 1월에 일본군 수비대 지휘관 요시다를 [[창평군|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ref name="전자"></ref> 2월 [[기삼연]]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에서 총살되었고, 4월에는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ref name="캐스트"></ref> 오성술은 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全海山)과 더불어 의진을 수습하고, 일부의 잔병은 [[조경환 (1876년)|조경환]](曺京煥)이 인솔하였다.<ref name="전자">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오성술]. 독립유공자 공훈록. 2020년 2월 14일 확인함.
1909년 8월 영산포 헌병대 요시무라 중위가 이끌던 ‘폭도토벌대’의 추격을 받다가 교전 끝에 결국 체포되었다.<ref name="캐스트"></ref> 오성술은 16세에 금성 나씨와 결혼하여 26세에 얻은 1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군 헌병대에 붙들렸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7859
|제목 = 한말 의병장들은 어떻게 대를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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