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158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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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 평가 ===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당시 주화론과 협상론을 주장하였므로, 그는 협력자로 몰려 비판받았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사람들의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ref>예를 들면 최명길을 '진회의 죄인'이라고 말한 [[윤집]](인조실록, 인조 14년(1636) 11월 8일(무신) 기사), 그를 “그 해가 두 개인 것을 인정하려 한다.”라고 말한 [[정온 (1569년)|정온]](정온, 《동계집》 권3, 산성에서 올린 차자[두 번째]), "지친지천 같은 자는 결국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지."(안정복, 《순암집》 권1, 남문을 나가는데 최 지천의 그 때 일이 생각나 말 위에서 개연한 마음으로 절구 일곱 수를 읊었다 중 일곱 번째 수)라고 말한 [[안정복]]을 들 수 있다.</ref> 그러나 그의 주화론, 협상론은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 와서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양명학]]에 관심을 보이고 이를 깊이 연구한 것에 대해서도 바르지 못한 학문에 관심을 보였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으며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려는 시도도 나타났지만 이는 조선이 멸망한 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