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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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다. 24일에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西賊)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27일 선봉대로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음력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는 송림리 전투 후 5일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으며고립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전세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다.
 
이에 정부군은 땅굴을 파들어가 화약으로 성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5월 29일]]([[음력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842명)와 열살 이하의 남자 [[소년]](224명)을 제외한 1,917명이 전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