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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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 13년([[347년]]),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었다. [[인도]]의 승려 [[불도징]]이 후조에 오자 석호는 이농으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불도징이 기거하는 곳으로 가서 문후를 묻도록 하였다. 건무 14년([[348년]]), 명을 받고 태위(太尉) 장거와 함께 의논하여 석호의 아들 [[석세]]를 태자로 세웠다.
태녕(太寧) 원년([[349년]]), 양독(梁犢)이 후조에 반기를 들자 석호는 이농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대장군의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이농은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이끌고 양독을 토벌하였으나 신안(新安, 현재의 [[허난성]] [[몐츠현]] 동쪽)과 [[뤄양|낙양]]에서 계속 패하였다. 석호가 죽고 석세가 즉위한 뒤 장시(張豺)가 태위 장거를 찾아가 이농을 주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장거와 이농은 사이가 밀접하였으므로 장거가 그 사실을 이농에게 말하였다. 이농은 그것을 들은 뒤 광종(廣宗)으로 달아났다. [[석준]]이 석세를 죽이자 이농은 돌아와 석준에게 귀부하여 사죄하였고, 석준은 그의 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석충
이듬해 [[350년]] 윤정월, 석민과 이농이 석감을 폐하고 죽였다. 이에 사도(司徒) 신종(申鐘) 등이 석민에게 존호를 올렸고, 석민은 이를 사양하고 이농에게 양보하였으나 이농도 굳게 석민에게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석민이 즉위하여 대사면령을 내렸고, 연호를 영흥(永興)으로 고친 뒤 국호를 대위(大魏)라고 하였다. 3월, 석민이 원래의 성인 염(冉)으로 되돌렸고, 이농을 태재(太宰), 겸태위(兼太尉), 녹상서사(錄尚書事)로 임명하고 제왕(齊王)으로 봉하였다. 이농의 아들들은 모두 현공(縣公)으로 봉해졌다. 4월, 염민이 이농과 그의 세 아들을 죽였고, 동시에 상서령(尚書令) 왕모(王謨), 시중(侍中) 왕연(王衍), 중상시(中常侍) 엄진(嚴震)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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