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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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유인형(장녀) <br> 유덕형(장남)
| 친척 = [[유치환]](아우) <br> 유지영(할아버지) <br> 유계원(증조할아버지)
| 활동 기간 =
| 장르 = 희곡,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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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상남도]] [[통영시|통영군 충무읍]]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한 뒤 10대 시절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릿쿄 대학교]] 영문학과를 학사 학위했다.
〈토막〉을 비롯하여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1933), 〈빈민가〉(1935), 〈소〉(1935) 등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카프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로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발표한 평론인 〈노동자 구락부극에 대한 고찰〉(1932) 등에도 계몽적 한계는 엿보이나 진보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유치진의 초기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예를 들어
광복 후 [[우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며 반공 작품을 공연했고, [[대한민국]] 연극계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기의 대표 희곡으로는 좌익 측에 대한 비판 의식이 포함된 〈조국〉(1946), 〈자명고〉(1946), 〈별〉(1948), 〈흔들리는 지축〉(1949)이 있다. [[한국 전쟁]] 이후로는 우파적 경향성은 희석되고 영화, 음악, 무용 등 인접 장르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실험적 기법을 시도했다.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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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진은 [[일제 강점기]] 당시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한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었기 때문에 [[반공주의]]가 다른 이념이나 논리에 앞서던 1950년대에 극예술연구회 시절부터의 동료인 [[김광섭]]과 희곡 〈왜 싸워〉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등 이미 연극계 친일 논란의 중심이었다.
|저자 = 김재용
|제목 = 친일문학 작품목록
|저널 = 실천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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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l = 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
|확인날짜 = 200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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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날짜 = 2007-09-28
|url-status = dead
}}</ref>,
시인 [[유치환]]의 친형이며, 자녀들은 모두 연극계에서 활동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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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랑청소년종합예술제
==
* {{서적 인용
|저자=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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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
|페이지=603~
* {{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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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돌베개
|출판위치=서울
|
|장=유치진 :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박영정)}}
== 각주 ==
{{각주}}
{{극예술연구회 창립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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