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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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 6세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일할 때도 말과 풍습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로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하드리아노 6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세속 군주들이 서로 손을 잡아 대항하기를 바랐으나, 서로 이해관계가 달랐던 기독교 군주들 사이를 평화롭게 중재하는 일에 적임자는 아니었다.
 
소데리니 추기경이 프랑스 왕과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서 그를 체포한후 프랑수아 1세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프랑수아 1세는 롬바르디아 침공준비를 진행하였고 그전까지 정치적인 중립을 고수하던 교황은 1523년 8월에 신성 로마제국,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밀라노등과 반-프랑스 군사동맹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초창기 [[루터파]]의 봉기에 대해 하드리아노 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1522년 12월 개회된 뉘른베르크 의회에서 프란체스코 키에리카티가 하드리아노 6세를 대신하여 참석하였는데, 사적 훈시에서 그는 교회 내 혼란은 무엇보다 [[로마 교황청]]의 책임이 가장 크며, 따라서 로마 교황청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ref>Pigafetta, Antonio and Theodore J. Cachey, ''The first voyage around the world, 1519–1522'',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7), 128.</ref><ref>Hans Joachim Hillerbrand, ''The division of Christendom: Christianity in the sixteenth centu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 141.</ref> 하지만 과거 신학 교수와 이단심문관을 지냈던 하드리아노 6세는 또한 교리의 변경에 단호하게 반대함과 동시에 [[마르틴 루터]]는 [[이단]]적인 주장을 펼친 죄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