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콘웨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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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앤 핀치는 1631년에 [[헤니지 핀치]](Heneage Finch)와 그의 2번째 부인인 엘리자베스 크래독(Elizabeth Cradock) 사이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앤 핀치의 아버지인 헤니지 핀치는 [[찰스 1세]] 시대에 런던 법원 판사, 잉글랜드 하원 의장을 역임했지만 앤 핀치가 태어나기 1주일 전에 사망했다. 앤 핀치의 초기 교육은 가정교사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라틴어]] 교육만 받았지만 나중에 [[그리스어]]·[[히브리어]] 교육도 받게 된다.
 
앤 핀치의 이복형이자 [[오스만 제국]] 주재 잉글랜드 대사를 역임했던 외교관인 [[존 핀치]](John Finch)는 앤 핀치의 철학·신학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츠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크라이스츠 칼리지]]에서 앤 핀치에게 자신의 스승 가운데 하나였던 [[헨리 모어]](Henry More)를 소개하게 된다. 앤 핀치와 헨리 모어와의 인연은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을 주제로 한 평생 동안의 서신, 친밀한 우정으로 이어졌는데 앤 핀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헨리 모어의 비공식적인 제자를 넘어 헨리 모어와 지적한 지성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리처드 워드가 1710년에 집필한 저서인 《헨리 모어의 인생》(The Life of Henry More)에 따르면 "헨리 모어와 콘웨이 부인보다 더 나은 자연적인 부분을 가진 인간, 남자와 여자와의 만남은 드물다. 자연스럽고 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지식에서도 세상의 모든 성을 단 한 번도 능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콘웨이는 당시 가족이 소유했던 [[켄징턴궁]]으로 알려진 관저에서 성장했다.
 
앤 핀치는 1651년에 훗날 제1대 콘웨이 백작(1st Earl of Conway)을 역임한 귀족인 [[제1대 콘웨이 백작 에드워드 콘웨이|에드워드 콘웨이]](Edward Conway)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꿨는데 헨리 모어는 앤 핀치에게 자신의 저서인 《무신론에 맞서는 해독제》(Antidote against Atheism)를 결혼 기념 선물로 주었다. 1658년에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헤니지 에드워드 콘웨이를콘웨이(Heneage Edward Conway)를 낳았지만 불과 2년 후에 [[천연두]]로 사망하고 만다. 앤 콘웨이의 남편도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헨리 모어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앤 콘웨이는 자신의 생각의 깊이와 관심의 다양성에서 남편을 훨씬 능가했다.
 
앤 콘웨이는 한때 [[랍비]]이자 [[유대교]] [[신비주의|신비주의자]]였던 [[이사크 루리아]]에 관심을 가졌지만 1677년에 [[퀘이커]]로 개종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잉글랜드 사회에서는 퀘이커를 증오,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박해, 투옥을 받고 있었다. 콘웨이는 자신의 집을 퀘이커 활동의 중심지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퀘이커를 널리 확산시키면서 대담하고 용감한 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