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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년 8월,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후 동맹국들이 만토바에 모여서 향후 이탈리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피렌체에 대해 응징을 결의하였다. 교황은 비록 지난 4월 라벤나 전투에서 조반니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이 패배를 하였으나 과거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며 그를 교황군 특사로 임명한후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함께 피렌체 정복을 명했다.
 
신성동맹군(교황령+스페인) 내부에서 이번 원정에 대해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르비노 공작은 대포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자 조반니 추기경이 대포를 직접 구입하여 보강하였다. 스페인군이 식량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그 비용을 지불하였다. 1512년 8월 하순에 신성동맹군은 볼로냐를 출발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영지인 [[프라토]](Prato)에 도착하였다. 프라토는 수도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도시로 피렌체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이 함락되면 반나절만에 신성동맹군이 피렌체에 접근할수들어닥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곳이였다.
 
우선 조반니 추기경은 피렌체 정부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피렌체 종신 총리(總理) 소데리니는 이를 거부했다. 프라토(Prato)에는 마키아벨리가 양성한 9,000명의 국민군이 지키고 있기에 6,000명 정도인 신성동맹 병력보다 숫적으로 우월하여 충분히 방어해낼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캉브레 동맹전쟁 기간내내 피렌체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만일을 대비하여 성채등 요새를 보강하고 군사력을 키워왔기에 승산이 있어보였다. 그러나 막상 8월 29일에 전투가 벌어지자 창설된지 4년밖에 안되는 피렌체의 국민군은 전투경험이 전무한 오합지졸이였고 노련한 신성동맹군의 용병들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이 들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