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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조반니 추기경은 피렌체 정부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피렌체 종신 총리(總理) 소데리니는 이를 거부했다. 프라토(Prato)에는 마키아벨리가 양성한 9,000명의 국민군이 지키고 있기에 6,000명 정도인 신성동맹 병력보다 숫적으로 우월하여 충분히 방어해낼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캉브레 동맹전쟁 기간내내 피렌체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만일을 대비하여 성채등 요새를 보강하고 군사력을 키워왔기에 승산이 있어보였다. 그러나 막상 8월 29일에 전투가 벌어지자 창설된지 4년밖에 안되는 피렌체의 국민군은 전투경험이 전무한 오합지졸이였고 노련한 신성동맹군의 용병들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프라토는 함락되었고 광분한 스페인 용병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파괴,방화,강간에 몰두하였다. 지휘부가 통제할수 없는 수준으로 용병들이 포악해지자 조반니 추기경은 교회건물에 프라토 부녀자들을 도피시킨후 바리케이트를 치고 교황군을 동원하여 경비를 서며 부녀자들이 강간당하는것을 막기조차 하였다막아야했다. 학살수준에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역사가들은 이때 프라토의 총 인구는 약 6천여명으로 이중에 약 3,000명 이상이 살해당했을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반나절 거리에 있는 프라토가 허망하게 함락당한후 잔인하게 약탈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또한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이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였다. 시위가 거칠어지던중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추기경으로 부터 항복을 종용하는 서신이 도착하자 피렌체의 수상인 소데리니는 망명에 대한 신변안전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수용되자 사임을 한후 피렌체를 떠나 망명길레 올랐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은 교황 율리오 2세로 부터 임영받은 교황특사의 자격으로 1,5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하였다. 이로써 1494년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이후 18년만에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