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브레 동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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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의 결성''' (1510년) ====
캉브레 동맹을 통해 베네치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는 성공을 하였으나 전쟁을 치루는 동안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이를 우려한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와 새로운 동맹을 체결한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ref>교황이 새로운 동맹결성을 제안하자 베네치아는 흔쾌히 응했다. 프랑스군에 의한 베네치아 공격이 임박했었기 때문이다.</ref> 교황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프랑스와 동맹인 페라라 공국을 침공하여 교황령에 편입하려고 시도하였다.<ref>페라라 공작 알폰소 테스테는 자신이 최근 확보한 폴레신 지역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고 베네치아를 계속 공격하였고 교황령내 소금독점 면허 관련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ref><ref>교황들존 줄리어스 로리치<교황연대기> 532페이지 바다출판, 페라라 군주 알폰소 1세 데스테는 과거에 프랑스 국왕의 대리인 역활을 한바 있다. 코마치오 에 있는 알폰소의 염전이 체르비아에 있는 교황의 염전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남편이자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사위였기에 교황 율리오 2세에게는 불편한 인물이였다.</ref>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에 대해 성무정지 조치를 내렸다. 프랑스 루이 12세는 1510년 [[시노드]]를 통해 교황에 대한 순명 거부와 교황 율리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이를 위해 피렌체가 통치하고 있는 [[피사]]<ref>로저 마스터스<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마키아벨리> 233페이지, 마키아벨리가 주장하여 징병제를 토대로 만든 국민군의 노력으로 1509년 66월부로  피사는 피렌체가 통치하고 있었다. 피사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한 것은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원정때 피렌체가 프랑스군에 항복하면서 부터이다.</ref>에서 1511년 11월에 공의회 개최할것를 선언하였다.<ref>이일로 인하여 피렌체는 1512년 스페인군에 의해 응징을 당하여 친 프랑스 정부가 전복되고 메디치 가문에게 18년만에 통치권이 돌아가게 된다. </ref> 이에 대해 교황은 격노했다.  
 
[[파일:Bemberg Fondation Toulouse - Portrait d'Alphonse dEste - Titien Inv.1053.jpg|섬네일|율리오 2세에게 파문당한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 그는 교황군에 수차례 패배를 가했다.]]
 
====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 (1510년 7월) ====
1510년 7월, 새로운 베네치아-교황령 동맹군은 공세적이였다. 프랑스가 점령한 [[제노바]] 공격에는 실패하였지만; [[루체 말베초]] 지휘하의 베네치아군은 마침내 8월초 비첸차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우르비노 공작]]이 이끄는 교황군과 합류하여 8월 17일 [[모데나]]를 점령했다. 율리오 2세는 [[알폰소 데스테를1세 데스테]]를 파문하여 페라라 공국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연이어 곧 승리할것으로 보고 페라라 근처에 있는 [[볼로냐]]로 거처를 옮겼다.(볼로냐는 페라라가 점령했던곳이다.)<ref>Norwich, ''History of Venice'', 415.</ref>
 
==== '''프랑스의 반격''' (1510년 10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