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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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한 후 후임 교황 자리를 놓고 당시 추기경단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인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과 당연히 적수가 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콘클라베에서 최종적으로 다수의 표를 획득한 인물은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이다. 이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가 콘클라베 당시 거액의 뇌물로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를 비롯한 많은 추기경들의 표를 사들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하여 그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1494년 초에 줄리아노 추기경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로 피신했다가, 몇 달 후에 다시 프랑스 [[파리 (도시)|파리]]로 피신하였다.
 
==== 샤를 8세와 이탈리라이탈리아 원정 ====
파리에서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를 만나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라고 부추겼다. 결국 1494년 9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노린 샤를 8세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자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그를 수행하여 알렉산데르 6세의 저항을 무마시키고 로마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의 폐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조속히 소집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알렉산데르 6세가 샤를 8세의 신하인 [[기욤 브리소네 (추기경)|기욤 브리소네]]를 추기경에 서임하여 샤를 8세의 환심을 얻으면서 줄리아노 추기경의 계획이 무산되었다. 다시 도피하여 알렉산데르 6세가 죽을때까지 은신하며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