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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진도독 수행 ===
[[664년]]([[
악화되던 나당관계가 고구려 멸망 후 표면화되면서 웅진도독부와 신라는 전투를 벌였고 결국 [[672년]]([[함형]] 3년)에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의해 축출되엇다.<ref>《삼국사기》36권 잡지 제5 지리3 신라. 혹은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했다는 [[671년]]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1년</ref> 웅진도독부는 [[676년]]([[상원 (당 고종)|상원]] 3년) 고구려의 성이었던 [[건안성]](建安城)에 재설치되어 서주(徐州)와 연주(兗州) 등에 있던 남부여 유민들도 옮겨갔다.<ref>《자치통감》202권 당기18 고종 의봉 원년</ref> [[677년]]([[의봉]] 2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완패하여 당나라 장수였던 부여융은 다시는 한반도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광록대부(光綠大夫)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사지절(使持節)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임명받아 [[요동]]에서 남부여 유민들을 억압했다.<ref>《구당서》199권上 열전 제149上 백제</ref> [[682년]]([[영순 (당)|영순]] 원년) 68세의 나이에 뤄양에서 병사해 [[북망산]]에 묻혔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았다.<ref name="카를 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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