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드 푸아티에 공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생애: 1442년에서 1142년으로 수정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파일:RaymondOfPoitiersWelcomingLouisVIIinAntioch.JPG|섬네일|[[루이 7세]]의 안티오키아 입성을 환영하는 레몽.]]
'''레몽 드 푸아티에''' ({{llang|oc|Raimon de Peitieus}}, {{llang|fr|Raymond de Poitiers}}, [[1115년]]경 – [[1149년]] [[6월 29일]] )은 [[1136년]]부터 [[안티오키아 공국|안티오키아의 공작]]이었다. 비잔티움 제국과 분쟁을 벌였으며 이슬람의 [[누르 앗 딘]]과 전투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 출신으로 '''푸아티에의 레몽'''으로도 부른다출신이다.
 
== 생애 ==
레몽은 [[아키텐 공작]] [[기욤 9세 (아키텐)다키텐 공작|기욤 9세]]와 [[툴루즈 여백작 필리파|필리파]]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안티오키아 공국]]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 [[예루살렘의 풀크|풀크]]가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상속녀 콩스탕스]]의 섭정으로 있었는데 콩스탕스와 레몽을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레몽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궁정에서 있다가 [[1136년]] 4월 안티오키아로 와서 어린 콩스탕스와 결혼해 안티오키아의 공작이 되었다.
 
레몽은 [[아키텐 공작]] [[기욤 9세 (아키텐)|기욤 9세]]와 [[툴루즈 여백작 필리파|필리파]]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안티오키아 공국]]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 [[예루살렘의 풀크|풀크]]가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상속녀 콩스탕스]]의 섭정으로 있었는데 콩스탕스와 레몽을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레몽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궁정에서 있다가 [[1136년]] 4월 안티오키아로 와서 어린 콩스탕스와 결혼해 안티오키아의 공작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황제]] [[요한네스 2세]]는 [[제1차 십자군]]이후 십자군이 제국과 한 약속을 어긴 것을 비난하여 안티오키아의 복속을 요구했다. [[1137년]] 요한네스 황제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했고 결국 레몽은 제국과 협력을 약속하고 [[에데사의 조슬랭 2세]]등 십자군 가신들과 함께 [[시리아]]의 이슬람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요한네스는 얼마 안가 비잔티움으로 돌아가 버렸고 레몽은 다시 비잔티움에 반기를 들었다.
줄 14 ⟶ 13:
루이 7세가 안티오키아를 떠나고 [[1149년]] 레몽은 장기의 뒤를 이은 [[누르 앗 딘]]을 공격했으나 전투에서 패했다. 레몽은 포로로 붙잡혀 [[살라흐 앗 딘]]의 삼촌인 [[시르쿠]]에 의해 목이 잘렸고 그 목은 은상자에 담겨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 가족관계가족 관계 ==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레몽의 결혼에서 세명의 자녀를 낳았다.
 
* [[보에몽 3세]] : 안티오키아 공작위 계승
*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마리아]] :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와 결혼
* 필리파
 
== 각주 ==
{{각주}}
<references/>
 
{{안티오키아 후작|보에몽 1세}}
 
{{기본정렬:레몽, 안티오키아}}
{{안티오키아 후작|보에몽 1세}}
[[분류:안티오키아 후작]]
[[분류:1115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