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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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시조= [[김알지]]
|중시조 = 김선궁, </br>김한충,<ref>김추 김추계열(추정)</ref>
|집성촌 =
* [[대구광역시]]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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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춘천시]] [[원주시]] [[홍천군]] [[화천군]] 일원
* [[제주도]]
|인물 = [[김선궁]]계 : [[김원숭]], [[문화왕후]], [[김제 (문신)|김제]], 김주, 김달상, [[김효정]], [[김숙자 (1389년)|김숙자]], [[김종직]], 김지경, [[김응기]], [[김효원]], [[김이원]], 김신원, 김세렴, [[김익용]], [[김범부]], [[김동리]], [[김윤환 (1932년)|김윤환]], [[김태환 (1943년)|김태환]], [[김재홍 (1945년)|김재홍]], [[김평우]], [[김영선 (1960년)|김영선]], [[김기수 (사회 운동가)|김기수]], [[김연우]], 김현익, [[김정훈 (1980년)|김정훈]]</br>[[김한충]]계 : </br>김추계 : 김기, 김취성, 김취문, 김정묵, 김덕, [[김관용]], 김성조, 김상조<ref>김추 계열(추정)</ref>
|년도= 2015
|인구= 138,81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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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김씨'''(善山 金氏)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 시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 '''김선궁(金宣弓)'''의 후손들이 [[선산읍|선산]]을 관향으로 하여 세계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원성왕]] 후예 [[김한충]]의 후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가 고려말 [[선산읍|선산]]으로 낙향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선산읍|선산]]을 관향으로 하였다. 이들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다.<ref> [[1939년]] 일제시대에 선산 김씨 함경도 북종파 족보에 시조 '''김기'''를 [[경순왕]] 8자라는 '''김추'''(金錘) 가상의 인물을 선계로 둔갑시켰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ref>
신라 시대 [[김알지]](金閼智) 공의 후손이라 전하여지는 '''선산 김씨'''(善山 金氏) 본관 관향 성씨는 '''선궁(宣弓)'''의 후손 계통이 하나였으나,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 선생이 선산으로 낙향하여 후손이 선산김씨, 2000년대 김추의 후손등 서로 다른 3개가 있다.
 
첫째는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대광시중(大匡侍中)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고,계통을 둘째는'일선 김씨'로, [[원성왕]] 후손으로후예 좌복야(左僕射)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며,계통을 셋째는'들성 김씨'로 불렀다. 일제시대 들어 [[경순왕김한충]] 아들계열 일부가 '''김추'''(金錘. 추정)를 시조로 하는하여 계통이다나눠져 졌다.<ref>다양한 이들은사료들이 이조(異祖)김추 동본동성(同本同姓)이다계열의 선계가 [[원성왕]]의 8세손 김유염과 그의 아들 [[김한충]]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ref>
 
== 개요 ==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조상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에 뿌리를 두고 같은 성씨를 쓰며 마치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인양 오인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선산 김씨'(善山 金氏)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를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라 한다. 김선궁(金宣弓)계가 선산김씨(善山 金氏)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김한충]](金漢忠)계는 남한 인구 조사에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김추(金錘) 계열만 집계되고 있다.<ref>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일선 김선궁)[[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84]]</ref><ref>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들성 김추계)[[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6715]]</ref><ref>"선산(일선)김씨분파[[http://www.surname.info/gim/seon_san1.html]]</ref>
 
이와 같이 선산 김씨가 동성동본의 한 집안인 것처럼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경북 [[선산읍|선산]](善山)에 뿌리를 두었는데, 한쪽 집안은 선산(善山)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쪽은 선산 고을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을 본관으로 사용하여 왔는데, 이후 지명이 지금의 [[선산읍|선산]]으로 바뀌어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고치는 바람에 기존의 선산 김씨 집안과 혼동이 발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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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백제를 정벌할 때 숭선(嵩善. 지금의 경북 [[선산군|선산]]) 지방 전투에 병사를 모집함에 '''김선궁'''(金宣弓)이 고을 아전(衙前)으로써 응모하니, 태조는 자신이 쓰던 활 어궁(御弓)을 하사하고 이름도 선궁(宣弓)이라 지어 주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식읍을 지급받았다. 아들 김봉문(金奉文)은 [[선산군|선산]](善山)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좌윤(左尹)으로 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선산군|선산]](善山)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조선 태종]] 때 [[선산]](善山)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선산 김씨'''(善山 金氏)로 개관(改貫)하였다.<ref>외지에서는 '''선산 김씨'''로 통용되지만, [[선산군|선산]]에서는 아직도 [[경순왕]]의 아들 '김추'(金錘) 계통을 '''선산 김씨(들성)'''라 하고, '김선궁'(金宣弓) 계통을 '''일선 김씨'''라 하여 구분한다.</ref>
 
〈순충공 신도비명(順忠公 神道碑銘)〉에 처음 적(籍)을 일선(一善, 선산의 옛 이름)에 두어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나, [[조선 태종]] 때 지명이 선산(善山)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관향(貫鄕)을 [[선산읍|선산]](善山)으로 하였다고 한다.<ref>선산김씨 김선궁(金宣弓)계 [[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웨이백|url=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date=20060628051932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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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택]] : 한글 학자, 한글 학회 회장, 한글 학회 이사장
* [[김영철]] : 대구 고검장, 법무 연수원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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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성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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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에 대해 ===
선산 김씨(일선) 대동보 경오보(庚午譜)에 의하면 판서공 김원로의 사위 김기(金起)의 선계에 대하여 [[김한충]]의 후손 경주인(慶州仁), 고려(高麗) 추밀사(樞密司) [[김한충|한충]](漢忠) 지후(之後) 자손(子孫) 개본(改本) 선산(善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기(金起)의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라 한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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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추(金錘) 계-(추정) ==
=== 역사 ===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맏딸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소생의 8자로8자<ref>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8자가 '''김종'''(金鐘)이라 하였다.</ref>로 상서령을 지내고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혹칭 '''들성(평성) 김씨'''(坪城 金氏) 라고도 한다.<ref>선산김씨 김추(金錘)계[[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웨이백|url=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date=20060628051932 }}]]</ref>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말 출사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개탄하여 관직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낙향하여 [[선산군]] [[옥성면]]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화의(和義)는 [[선산군|선산]](善山)의 별호인 관계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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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에 대해 ====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 《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라 한다.
 
==== 시조에 대해 ====
시조가 [[경순왕]]의 8자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라 하는데,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는》 원문에는 [[경순왕]]의 8자가 '''김종'''(金鐘)이라 한다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이름이 등재되기 시작하였는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김종'(金鐘)을 '김추'(金錘)로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한 '김종'(金鐘) 또는 '김추'(金錘)를 비롯한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삼척 김씨]](三陟 金氏)도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를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도문헌에는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氏)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조 '''김추'''(金錘)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 및 견해가 난무하는 관계로 좀더 고증을 거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ref>[[1939년]](소화 14) 경상북도 선산 김씨(善山 金氏) 대종회에서 발행한 선산 김씨(善山 金氏) 족보(族譜) 상권(上卷)에는 시조 1세를 '''김기'''(金起)로 하고 있으면서, 『단천족보(端川族譜)』 고전(考傳) 기록에 경북 선산 남종파(南宗派)에서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할 때 함경북도 북종파(北宗派)에서 시조를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제8남 김추(金錘)의 후손(後孫)이다.”라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라면서 의심할 “의(疑)” 자를 기록해 놓았다.[三陟金氏와 善山金氏 貫祖에 대한 硏究 및 文獻의 考察 -各種 文獻 考證을 中心으로- 白松 金宰弘/三陟金氏譜學硏究會硏究委員] </ref>
 
=== 분파 ===
고려 말엽에 검교중랑장을 지낸 16세 '김문'(金文)은 슬하에 네 아들 [[김성원 (고려)|김성원]](金成元), 김성부(金成富), 김성룡(金成龍), 김성여(金成呂)를 두었는데 이로부터 선산 김씨는 4대 계파(系派)를 이루게 되었다.
 
*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 파조 [[김성원 (고려)|김성원]](金成元)은 고려조 서운관정(書雲觀正)과 중서령(中書省)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기'(金起)는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 정신으로 선산(善山)에 내려와 고려 유신으로 절의를 지켰다. 화의(和義)는 [[구미시|선산]](善山)의 별호이다.
 
* '''판서공파'''(判書公派) : 파조 '김성부'(金成富)는 고려조 전의부정(典醫副正)을 지내고, 조선개국 원종공신으로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장자 김경도(金敬道)는 조산대부로 밀양교수를, 차자 김경적(金敬迪)은 강화교수를 지냈다. 그 후손들은 함경도 단천 고읍을 중심으로 길주, 성진, 이원, 풍산, 북청, 홍원 등에 세거(世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