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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이름 = 건복제끼엔푹 |원래 이름 = 建福帝황제
|원래 이름 = Kiến Phúc / 建福
|그림 = Kien Phuc.jpg
|그림설명 =
|그림설명 = 군복을 입은 끼엔푹 황제
|서명 =
|문장 =
|문장설명 =
 
|작위 = [[베트남의 군주 목록|베트남 황제]]
|재위 = [[1883년-]] ~ [[1884년]]
|대관식 =
|즉위식 =
|전임자 = [[히엡호아제|협화제히엡호아 황제]]
|후임자 = [[함응이제|함의제함응이 황제]]
|섭정 =
|재상 =
|총리 =
 
|휘 = '''응우옌푹하오'''<br />({{vie|v=Nguyễn Phúc Hạo|hn=阮福昊|eum=완복호}})<br /><small>'''응우옌푹응당'''<br />({{vie|v=Nguyễn Phúc Ưng Đăng|hn=阮福膺登|eum=완복응등}})<br />'''응우옌푹응호'''<br />({{vie|v=Nguyễn Phúc Ưng Hỗ|hn=阮福膺祜|eum=완복응호}})</small>
|별호 = '''양선당'''<br />({{vie|v=Đường Dưỡng Thiện|hn=堂養善}})
|별호 =
|연호 = [[끼엔푹 (연호)|건복끼엔푹]](建福)
|묘호 = '''간종'''<br />({{vie|v=Giản Tông|hn=簡宗}})
|존호 =
|시호 = '''소덕지효연예의황제'''<br />({{vie|v=Thiệu Đức Chỉ Hiếu Uyên Duệ Nghị Hoàng đế|hn=紹德止孝淵睿毅皇帝}})
|능호 = 배릉(陪陵)
 
|출생일 = [[1869년]] [[2월 12일 ]]
|출생지 =
|사망일 = [[1884년]] [[7월 31일]]
|사망지 =
|매장지 =
|능묘 = 향수현(香水縣) 거정총양춘상사(居正總楊春上社, 현재 [[후에시]] 투이쑤언방에 속함)
|능묘 =
 
|왕조 = [[응우옌 왕조|응우옌조]]
|가문 =
|아버지 = [[뜨득 황제]] (양부)<br />[[응우옌푹홍까이|견태왕 응우옌푹홍까이]] (생부)
|어머니 = 학비(學妃) [[응우옌티흐엉]] (양모)<br />부이티타인(裴氏淸) (생모)
|어머니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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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
'''끼엔푹'''({{vie|v=Kiến Phúc|hn=建福|eum=건복}}, [[1869년]] ~ [[1884년]])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7대 황제(재위:1883년 ~ 1884년)이다. 휘는 완복호(Nguyễn Phúc Hạo, 阮福昊)이며, 자는 완복응등(Nguyễn Phúc Ưng Đăng, 阮福膺登), 완복응호(Nguyễn Phúc Ưng Hỗ, 阮福膺祜)이다. 묘호는 '''간종'''(Giản Tông/簡宗), 시호는 '''소덕지효연예의황제'''(Thiệu Đức Chỉ Hiếu Uyên Duệ Nghị Hoàng đế/紹德止孝淵睿毅皇帝)이다. 재위 기간에 사용했던 연호가 통칭이 되어 건복제(建福帝)라고 부른다.
 
'''끼엔푹 황제'''({{vie|v='''Vua Kiến Phúc'''|hn=𤤰建福}}, [[1869년]] [[2월 12일]] ~ [[1884년]] [[7월 31일]])은 [[응우옌 왕조]]의 제7대 황제(재위: [[1883년]] ~ [[1884년]])이다. 성명은 '''응우옌푹하오'''({{vie|v=Nguyễn Phúc Hạo|hn=阮福昊|eum=완복호}})이다. 사용한 [[연호]]가 [[끼엔푹 (연호)|끼엔푹]]이었으므로 끼엔푹 황제라고 부른다.
15세에 황제로 즉위 하였지만, 불과 반년 동안 통치하다가 16세로 젊은 나이에 붕어 하였다. 재위 기간에 [[응우옌반뜨엉]]이 섭정을 맡았으며 동생의 함의제가 제위를 이었다.
 
== 생애 ==
본명은 '''응우옌푹응당'''({{vie|v=Nguyễn Phúc Ưng Đăng|hn=阮福膺登|eum=완복응등}})으로, 견군공(堅郡公) [[응우옌푹홍까이]]와 그의 정실 부이티타인(裴氏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뜨득 (연호)|뜨득]] 23년 봄 정월([[1870년]] [[2월]]), 백부인 [[뜨득 황제]]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셋째 양자로 입양되었고, 양선학관(養善學館)에 거주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곳을 '''양선당'''({{vie|v=Đường Dưỡng Thiện|hn=堂養善}})이라고 불렀다.
 
뜨득 황제에게는 양자 3명이 있었는데, 첫째가 [[죽득 황제]], 둘째가 [[동카인 황제]], 셋째가 끼엔푹이었다. 그중 끼엔푹이 가장 많이 총애를 받았고, 학비(學妃) [[응우옌티흐엉]]이 그의 양육을 부탁받았다. 예빈(禮嬪) 응우옌니으억티빅(阮若氏碧)의 말에 따르면 뜨득 황제가 사망할 때 원래는 끼엔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림을 생각하여 죽득이 즉위하도록 유조를 내렸다. 동시에 끼엔푹을 황자 신분으로 정식 승인하였고, '''응우옌푹응호'''({{vie|v=Nguyễn Phúc Ưng Hỗ|hn=阮福膺祜|eum=완복응호}})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죽득이 3일 만에 보정대신 [[응우옌반뜨엉]], [[똔텃투옛]]에 의해 폐위당하였고, [[히엡호아 황제]]가 옹립되었다. 오래지 않아 히엡호아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이에 끼엔푹이 황제로 옹립되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였다. 실제 권력이 없었고,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끼엔푹이 즉위할 당시, [[청나라]]-[[베트남]] 연합군과 프랑스는 [[통킹 원정]]으로 군사적 충돌을 지속하고 있었다. [[호앙따비엠]]은 선떠이(山西)에, [[쯔엉꽝단]]은 [[박닌성|박닌]]에 주둔하면서 청나라군 및 [[흑기군]]과 함께 프랑스의 침입에 대항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그들에게 [[후에]]로 돌아오도록 칙령을 내렸으나 그들은 거절하였다. 남딘제독(南定提督) [[따히엔]], 남딘안찰사(南定按察使) 팜부먼(范務敏), 끼엔쓰엉지부(建昌知府) [[호앙반호애]] 등은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선떠이찬양군무(山西贊襄軍務) [[응우옌티엔투엇]]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하이즈엉성|하이즈엉]]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해 프랑스군에 대항하였다. 여러 번의 격렬한 전투를 거쳐 프랑스군은 차례로 선떠이, 박닌, [[라오까이성|흥호아]], [[뚜옌꽝성|뚜옌꽝]] 등지를 점령하였다. 결국 청나라와 프랑스는 [[1884년]] [[5월 11일]]에 정식으로 [[톈진 조약]]을 체결해 청나라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6월 6일]], 베트남은 프랑스와 [[제2차 후에 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베트남은 청나라가 이전에 반급한 월남국왕(越南國王)의 금인(金印)을 녹여 없앴고, 청나라와의 조공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제2차 후에 조약이 체결된 뒤 베트남 전역은 남기(南圻), 중기(中圻), 북기(北圻)의 3개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응우옌 왕조 조정의 통치권은 중기에 한정되었다. 프랑스는 3개 지역 모두에 공사(公使, Résident), 부사(副使, Résident adjoint)를 설치하였다.<ref>「Résident」一詞在法語中是「駐紮官」的意思,但越南人習慣稱之為「公使」或「統使」;「Résident adjoint」則是「駐紮官助理」的意思,越南人稱之為「副使」。</ref> 또한 3개 지역에서 서로 다른 법률을 제정하여 이들이 더 이상 같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프랑스는 [[후에]]에 중기흠사(中圻欽使, Résident supérieur de l'Annam)<ref>「Résident supérieur d'Annam」意思是「安南駐紮長官」。但越南人習慣稱之為「中圻欽使」或「順化欽使」。</ref>를 설립하여 응우옌 왕조 조정을 능가하는 식민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갑신년([[1884년]]) 4월, 끼엔푹이 전염병에 걸렸다. 《안남통사(安南通史)》의 기록에 따르면 끼엔푹의 병은 6월 초하루에 호전되어 조회에 나올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위독해져서 6월 초열흘날에 사망하였다.<ref>岩村成允《安南通史》,星洲世界书局有限公司出版</ref> 궁중의 소문에 의하면 끼엔푹은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이 전권을 장악한 것에 대해 매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병을 얻었을 때 끼엔푹은 응우옌반뜨엉과 학비 응우옌티흐엉이 간통한 일을 발견하였고, 그들을 법에 따라 처리해 응우옌반뜨엉의 구족을 주멸하고자 준비하였다. 학비는 매우 두려워서 끼엔푹의 약에 독을 넣었고, 그것을 먹은지 이틀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15세였다.
 
끼엔푹이 죽은 뒤 향수현(香水縣) 거정총양춘상사(居正總楊春上社, 현재 [[후에시]] 투이쑤언방에 속함)에 장사지냈다. 그의 능묘는 뜨득 황제의 [[겸릉]] 곁에 위치하였고, 배릉(陪陵)이라고 호칭하였다. [[묘호]]를 '''간종'''({{vie|v=Giản Tông|hn=簡宗}}), [[시호]]를 '''소덕지효연예의황제'''({{vie|v=Thiệu Đức Chỉ Hiếu Uyên Duệ Nghị Hoàng đế|hn=紹德止孝淵睿毅皇帝}})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상의하여 뜨득 황제의 둘째 양자인 정몽당(正蒙堂) [[동카인 황제|응우옌푹응티]]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다만 응우옌푹응티는 나이가 있었으므로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아 그 대신 응우옌푹응티의 동생 응우옌푹응릭을 옹립하니, 그가 [[함응이 황제]]이다.
 
가흥왕(嘉興王) [[응우옌푹홍흐우]]가 비밀리에 끼엔푹의 사인을 조사하였는데, 똔텃투옛에게 발각되어 [[꽝찌성]] [[깜로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안가 죽임을 당했다.
 
== 가족 ==
*부: 견태왕(堅太王) [[응우옌푹홍까이]]
*모: 부이티타인(裴氏淸)
*조부: [[티에우찌 황제]]
*조모: 궁인(宮人) 장씨(張氏)
 
== 각주 ==
<references />
 
== 참고문헌 ==
{{위키문헌|zh:國朝正編撮要/卷之六|《國朝正編撮要·卷之六》}}
*{{언어링크|zh}}{{서적 인용|title=Việt Nam sử lược|trans_title=《越南通史》(原文書名:《越南史略》)|author=陳仲金|others=戴可來譯|location=北京|publisher=商務印書館|year=1992|isbn=7-100-00454-3}}
 
{{전임후임
|전임자 = [[응우옌히엡호아 왕조의 협화제|협화제황제]]
|후임자 = [[응우옌함응이 왕조의 함의제|함의제황제]]
|대수 = 7
|직책 =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제
|임기 = [[1883년]] ~ [[1884년]]
|앞이름 = 전 임
|뒤이름 = 후 임
}}
{{응우옌 왕조의 역대 군주}}
 
{{응우옌 왕조의 역대 군주}}
 
[[분류:1869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