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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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은 [[고려]] 말의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역대"> [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514&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50043004F0063005F00410031003300340037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900300032&pName=C774C22DC7780028674E5D074EC1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ref>
 
[[공민왕]] 때 문과에[[과거 급제하여제도|문과]]에 숙옹부승이급제한 되었다후 예의 산랑(禮儀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숙옹부승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에[[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원의[[원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으며,있다. 그 후 [[정몽주]]와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찬하였다.편수하고, [[1386년]] ([[고려 우왕|우왕]] 때와12)에 [[1389년]]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창왕이인임]] 인족(姻族)이라 하여 차례유배되기도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하였다. [[1392년1389년]] [[이방원창왕]] 의해때에도 정몽주가사신으로 살해될명나라에 다녀왔다. 일당으로 몰려후에도 유배되었다가혼란기를 맞아 유배·감금되었고, [[조선1392년]]([[공양왕]] 건국되자 정도전의 부하4) [[황거정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정몽주가 그는 당시의 복잡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는데,살해되자 그의 문장에일당으로 명의 태조도 탄복했다고몰려 한다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의 부하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저서로 《도은집》이 있다.
 
== 평가 ==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명과의 외교 문제를 맡아 썼으며, 그의 명문장은 명 태조를 탄복시켰다. 저서로는 《도은선생시집》(흔히 《도은집》)이 있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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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삼은}}
{{글로벌}}
{{토막글|한국 사람}}
 
{{글로벌세계대백과}} <!-- 〈고려 후기의 문화〉 -->
[[분류:1347년 태어남]]
[[분류:1392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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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고려의 유학자]]
[[분류:암살된 사람]]
[[분류:과거 급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