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감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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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國子監)은 [[992년]]([[고려]] [[고려 성종|성종]] 11)에 설립된 [[고려 시대]] 국립 고등 교육 기관으로 [[수도]] [[개경]]에 위치하였다.

== 연원 ==
국자감의 창설은 [[신라]]로부터 이어온 [[국학]]을 [[당나라|당]]·[[송나라|송]]의 제도를 참작하여 정식으로 개편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유학부(儒學部)와 잡학부(雜學部)로 이루어졌으며,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였다.
 
한편 고려의 교육기관으로 [[고려 태조|태조]] 때 경학(京學)이 있었으나, 성종은 모든 제도를 정비하면서 경학을 국자감으로 개편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유학부(儒學部)와 잡학부(雜學部)로 이루어졌으며,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였다.
 
== 구성 ==
* 경사6학(京師六學) : 6개의 교육 과정. 각 교육과정에는 조교(助敎)가 딸렸다.
: 국자학(國子學)
: 태학(太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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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현고]](養賢庫): 장학 재단
* 서적포(書籍鋪): 출판부
 
== 운영 ==
[[고려 문종|문종]] 때에는 국자감에 제거(提擧)·동제거(同提擧) 각 1명, 판사(判事) 1명, 제주(祭酒 : 종3품) 1명, 사업(司業 : 종4품) 1명, 승(丞 : 종6품)·국자박사(정7품)·각인 태학박사(종7품) 2명, 주부(主簿 : 종7품)·사문박사(四門博士 : 정8품)·학정(學正 : 정9품) 2명, 학록(學錄 : 정9품) 2인, 학유(學諭 : 종9품) 2명, 직학(直學 : 종9품) 2명, 서학박사(종9품) 2명, 산학박사(종9품) 2명 등의 인원을 두었고, [[고려 예종|예종]] 때 판사를 대사성(大司成 : 종3품)으로 바꾸었다.
 
국자감의 학과는 효경·논어 1년, 상서(尙書)·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각 2년, 주역·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 각 2년, 예기·좌전(左傳) 각 3년을 전부 교수 받아야 하며, 율학·서학은 국어·설문(說文)·자림(字林)·삼창(三倉)·이아(爾雅) 등을 독서하여야 했다.
 
학생 수는 국자학·대학·사문학에 각각 300명으로 하였으나 많을 때는 600명까지 되었으며, [[고려 덕종|덕종]] 때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 학생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1101년]]([[고려 숙종|숙종]] 6)에는 국자감에 서적포(書籍鋪)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하였다.
 
== 입학 자격 ==
국자학에는 3품 이상, 태학에는 5품 이상, 사문학에는 7품 이상의 자손이자손과 서인이 입학할 수 있었고, 전문 학과인 잡학 3부(율학, 산학, 서학)에는 모두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庶人)이 입학할 수 있었다.
 
== 명칭 ==
국자감의 명칭은 [[고려]] 후기에 몇 차례 개칭되었다.

[[1275년]]([[충렬왕]] 1) 국학(國學)으로 개칭했다가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즉위하여 성균감(成均監)으로 고쳤고,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다시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쳤다. 그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환원했다가, 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양에도 성균관이 생겼으나, 개성의 성균관은 없애지 않고 존립하였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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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교]]
 
{{글로벌세계대백과}} <!-- 〈고려의 정치·경제·사회구조〉 -->
[[분류:한국의 학교]]
[[분류:고려의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