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색 사회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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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개혁 과정 ==
 
=== 계획 측면 개혁 과정<ref>오승렬,{{저널 인용|제목=중국경제의 개혁 - 개방과 경제구조, |저널=통일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오승렬|날짜=2001|쪽=p. 16 - 17}}</ref> ===
지방 정부 및 지방 관리 하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산업 원자재중 중앙정부의 명령적 배분 계획에 의해 조달되는 부분의 비중이 1980년의 경우 70%에 달했으나 1987년에는 20%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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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87년에 이미 생산 단위에 의해 직접 판매되는 소비재의 비중은 50%를 초과함으로써 소비재 부문에 있어서 시장기구의 역할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 가격 결정 및 시장 판매 조치 허용<ref>오승렬,{{저널 인용|제목=중국 경제의 개혁 - 개방과 경제 구조, |저널=통일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오승렬|날짜=2001|쪽=p. 19 - 21}}</ref> ===
중국의 가격체제 개혁은 선별적 가격조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가격에 대한 정부통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개혁 초기에는 생산단위의 이윤율과 해당 생산품의 수요를 고려하여 상대 가격을 조정하는데 정책 주안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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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부 연안지방에서는 생산재 시장의 역할이 매우 커서 강소성의 경우 1988년 강철 생산 총량의 91.6%가 생산재 시장을 통해 거래되었고 소비재의 경우에도 원활한 상품 교역을 위해 1986년 말에는 이미 상업부 관할하에 전국적으로 1,588개소의 교역 센터가 설립되었다.
 
또한 소비재 소매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작은 규모의 국영 상업 기구들을 1. 스스로의 손익에 대해 책임지도록 개조하거나 2. 집체 소유로 전환하거나 3. 개인 경영자에게 임대함으로써 효율적 경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ref>오승렬,{{저널 인용|제목=중국 경제의 개혁 - 개방과 경제 구조, |저널=통일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오승렬|날짜=2001|쪽=p. 17 - 19}}</ref>
 
=== 자금 조달 및 사적 기업 설립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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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영자가 실질적으로 상부 조직에 의해 임명되고 국가 간부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국유 기업의 자산 관리자 겸 생산 - 경영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상급 기관의 영향력에 상당부분 종속되었으며 종업원에 대해서도 평균주의가 완전히 극복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달성 목표를 설정할 때 하부 생산 단위와 상부 주관 기관 간 타협과 부정이 개입할 소지가 상존하였으며 반면 소형기업에 대해서는 기업의 자산 사용권과 경영 관리권을 경영자에게 유상 양도하여 경영자가 독자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임대제를 실시하였다.<ref>안예홍,{{저널 인용|제목=중국의 경제 개혁과 북한에 주는 시사점, |저널=한국은행|성=동북아경제팀|이름=안예홍|날짜=2004-12-07|쪽=p. 7 - 8}}</ref>
 
소형 국유기업과 도시 집체기업 및 농촌의 향촌기업에 대해서는 주식 합작 기업으로 전환시키거나 민간 매각을 실시하였으며 주식 합작 기업에서는 근로자들이 주주로서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급속한 사유화가 초래할 정치사회적 문제를 회피하고 근로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들에게 주식을 균등 분배해주는 주식 합작 기업 제도를 민간 매각과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다음으로 중대형 국유기업은 국유 독자 회사 또는 주식 회사와 같은 법인으로의 전환을 유도하였으며 국가 안전과 관련된 업종, [[하이 테크|하이테크]] 산업 등에 속하지 않는 국유 기업 중 경영이 극도로 악화된 국유기업은 퇴출시켰다.<ref>안예홍,{{저널 인용|제목=중국의 경제 개혁과 북한에 주는 시사점, |저널=한국은행|성=동북아경제팀|이름=안예홍|날짜=2004-12-07|쪽=p. 18}}</ref>
 
==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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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당국의 거시경제 조절 능력은 약화되었고, 경제가 혼란 상태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 사회적 위기가 나타났으며 중앙당국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당국으로 이양했던 제반의 권리를 회수하고, 재정 - 통화 - 분배에서 긴축 정책을 전개했다.
 
이는 생산성 저하로 이어졌으며 그밖에 행정성 분권 또는 방권 양리 방식의 개혁은 지방 당국 간의 시장 봉쇄, 지방 당국과 기업의 유착, 국가 재력의 분산 등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ref>이교덕,{{저널 인용|제목=북한 체제의 분야별 실태 평가와 변화 전망, |저널=통일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교덕|날짜=2006|쪽=p. 21}}</ref>
 
=== 정치 개혁의 요구 및 개혁파 실각 ===
다만 개혁 개방기 중국의 정치를 포함한 현대 중국의 정치사는 점진적 개혁이 아닌 불확실한 실험의 연속으로 이해 되어야 하며. 이는 근본적으로 중국의 정치 체제,특히 지도부의 속성에 기인하는데, 덩샤오핑의 경우도 모택동의 사망과 자신의 복권이 이루어지고 5 - 6년 후인 1982년 9월 제12차 당대회를 통해 자신은 군, 후야오방은 당, 자오쯔양은 정을 맡는 3인 체제를 비로소 구성할 수 있었으나,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개혁 성향의 [[후야오방]], 그리고 천안문 항쟁으로 인해 [[자오쯔양]]이 실각하는 과정을 겪은 사실이 이를 극명하게 방증하고 있다.
 
또한 덩샤오핑 자신도 1987년 10월 제13차 당대회에서 모든 당직에서 사퇴하고, 1989년 11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서도 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1997년 2월 사망 시까지 공식직함의 유무에 관계없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인정되었다.<ref>이교덕,{{저널 인용|제목=북한 체제의 분야별 실태 평가와 변화 전망, |저널=통일연구원|성=선임연구위원|이름=이교덕|날짜=2006|쪽=p. 33 - 34}}</ref>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