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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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그러나 이 '사불가론'은 이성계 당시의 기록인 이성계의 묘지문과 비석에는 없는 내용으로 후대의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들인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의 후대 조선 측의 기록들에서만 나와서 정말로 이 시점에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지 심각한 의문이 있다. 나중에 후대의 조선왕조측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정당화를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다.
 
[[우왕]]과 [[최영]]은 반대 여론을 무릎쓰고 출병을 강행하였다.<ref>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조선왕조의 고려시대 관찬사서들을 보면 '요동정벌'이 논의될때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의 고려말의 고려측 인물들은 물론이고,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이지란 등의 친 이성계 세력도 반대하지 않은 것과 또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 측이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소를 우왕에게 올렸을때 우왕이 이를 반박하는 교지를 내리면서 애초에 정벌이 논의되었을때는 모두가 다 찬성해놓고 왜 이제 와서 감히 명을 어기냐는 질책을 했을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사서들에서 당시 이성계 측과 후대의 조선왕조에서 반박하지 못한 점들을 들어 위의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ref>[[1388년]] 음력 4월 18일, [[고려]]는 전국에서 좌우군 3만8,830명, 수송대 1만1,634명, 말 2만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국내에서의 역모를 걱정한 우왕의 고집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양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