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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에서 항복한 항왜인 준사가 알아보고 이순신에게 가리켰다는 왜장 마다시에 대해서는, 정유재란 당시 구루시마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으나 울돌목에서 전사한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라고 알려져 왔으나, 《양국임진실기》(両国壬辰実記)의 찬자 야마자키 히사나가(山崎尚長)는 각주에서 [[아와지 섬]]을 중심으로 활약한 또 다른 수군 세력인 간 씨(菅氏)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자제 가운데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으로 불렸던 간 마사카게(菅正陰)를 마다시로 거론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울돌목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징비록]]》(懲毖錄)을 일역하기도 한 [[자이니치]](在日) 사학자인 박종명(朴鐘鳴)도 이 설을 지지하였다. 일본측 자료로 명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 장수의 한 명이었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행장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는 "선봉에 섰던 배들이 적선에 당해 부서진 것이 몹시 많았다. 그 와중에 구루시마 이즈모노도노(来島出雲殿)<ref>구루시마 미치후사의 관위는 종5위하 이즈모노카미(出雲守)였다.</ref> 도 전사(討死)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난중일기의 기록은 명량해전의 전체 기록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선묘중흥지》를 통해서 마다시는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의 해전 기록일 뿐 명량해전 전체의 기록은 아니므로 내도수와 마다시는 서로 다른 인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span style="font-size:10pt;"><sup class="noprint">&#91;<span class="plainlinks">[[위키백과:출처 필요|출처 필요]]</span>&#93;</sup></span>
 
===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