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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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icprmer (토론 | 기여) →전개 과정: 공관 총격전으로 부상 당한 인원이 보안사가 아닌 동조하던 육본 인원임을 명시함. |
Logicprmer (토론 | 기여) →전개 과정: 하나회 측에서 최규하 겁쟁이라는 평가에 관한 부분을 사건에 중심일수도 있는 국무총리를 포함하여 보강함. 노태우 소장 앞에 불필요한 '또한'을 삭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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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
{{출처|날짜=2020-03-24|같은 날 18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1148681</ref> 33헌병대는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병력이 경비하던 공관 내에서 보안사 차장의 보고라며 손님 대접까지 받으며 대기한다.<ref name="중앙일보증언">{{웹 인용 |url=https://news.joins.com/article/2146768|제목="총구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 정승화 전육참총장이 말하는 「12·12사태」|날짜=1987-11-11|출판사=중앙일보}}</ref>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고<ref name="중앙일보증언"/>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1926년)|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1공수특전여단은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달려갔다. 얼마 후, 1공수특전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을 사살한 후<ref name="사병"/>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는 총격전으로 국방부 건물 앞은 유리문 등이 부서지고 헌혈이 낭자하였다.<ref name="펜앤드마이크총리"/> 그리고 국방부
결국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5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1924년)|이희성]] 육군 대장으로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1924년)|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ref>{{인용문2|(12.12 군사 반란 이후) [[전두환]]이 쪽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1924년)|이희성]]」이라고 적혀 있기에 불쾌해서, '누구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느냐'고 화를 내었더니, [[유학성]]이 제 손을 잡아끌고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총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여 맡았다.|이희성 (1924년)|이희성|[[1995년]] 검찰 조사와 12.12 5.18 재판 2회 공판에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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