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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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공민왕]] 11년인 [[1362년]]의 2월, 나하추는 [[고려]]가 수복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기 위해,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함경남도]] [[홍원군|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갔다. 이에 고려 조정은 [[조선 태조|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시|함흥]] 평야에서 나하추의 군대는 대패하였다. 이 때문에,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이 완벽히 몰락했다.<BR />
이 전투 후 나하추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waa_000041&grp=&aid=&sid=15479073&pos=0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B면, 【영인본】 1책 4면]</ref><BR /> 그러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켰다는 이야기는 '사료의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 사실인지 의문이 드는 면이 있다. 이성계측의 관찬사서인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과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의 '삼봉집'이나 고려왕조 멸망 이후 이성계에게 출사해 조선의 신료가 된 권근의 '양촌집' 등의 이성계측의 기록들에만 보일뿐, 이성계의 반대편 인물들, 예를 들어 이색,이숭인,정몽주,원천석 등의 문집들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또 중국쪽 기록에서도 이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몽골측의 기록에도 역시 없는 내용이라 무조건 이성계가 납합출을 대패시켰다는 이야기에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다. 또 이성계가 나하추를 대패시키는 공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에서 아무런 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충분히 의문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하추는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활약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교차검증'이 안되므로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정사(正史)인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삼국사기'도 교차검증이 안되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황산대첩도 일본 측 기록에는 없으므로 교차검증이 안되니 없었던 일인가. 고려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된 측면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사관의 입장이지 아예 없는 사실 자체를 기록할만큼 허구로 가득찬 사서가 아니며, 고려사는 누구 한명이 얼렁뚱땅 대충 만든 사서가 아님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하추는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활약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이후 나하추는 [[1372년]] 명군의 보급 기지였던 우가장을 기습해 명의 병력 5000명을 죽이고 양곡 10만 석을 피해했다.<ref name="Ming_Yodong_GongMinKing">{{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2991.html|title=명-북원 세다툼 틈타 ‘요동정벌’ 칼 빼든 공민왕|publisher=한겨레|author=한명기|accessdate=}}</ref><B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