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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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예케 몽골 울루스의 서해(四海) 군주의 칙령}}
 
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렇지만 [[김호동]]은 여기에 보이는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표현이 꼭 ‘국호’로 보아야 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 까닭은 ‘울루스’라는 말이 일차적으로는 ‘부민(部民), 백성’을 뜻하기 때문에, ‘예케 몽골 울루스’를 하나의 고착된 용어로서의 국호가 아니라 그냥 그 뜻에 따라‘큰따라 ‘큰 몽골 백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은 구육이 보낸 서한의 첫머리에는 그것과 상응하는 구절이 [[투르크어]]로 “모든 큰 백성(kür ulugh ulus)”이라고만 되어 있고 ‘몽골’이라는 표현 자체가 빠져 있다는 점,<ref>P.Pelliot, Les Mongols et la Papauté (Paris, 1923), pp.15~25</ref>또한 그보다 약 20년 앞서 칭기즈 칸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칭기즈 석(石)’에도 [[몽골 문자|몽골어]]로 “모든 몽골 백성({{llang|mn|{{만몽 유니코드|ᠬᠠᠮᠤᠭ<br />ᠮᠣᠩᠭᠣᠯ<br />ᠦᠯᠦᠰ}}|Qamuɣ Mongɣol Ulus}})”라는 표현이 보인다는 점<ref> L. Ligeti, Monuments préclassiques, vol. 1 (XIIIe et XIVe siècles) (Budapest, 1972), p.17.</ref>을 생각하면 더욱 개연성이 있다.<ref>{{저널 인용|저자=김호동|날짜=2006|제목=몽골제국과 '大元'|저널=역사학보|호=192|쪽=223~224}}</ref>
 
과거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도 그러했지만 몽골인들 역시, 중국이나 다른 정주국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국호나 [[연호]]를 정하여 선포한다는 개념에는 매우 익숙하지 못했는데, 몽골의 군주들은 그저 자신을 모든 몽골 백성들의 통치자라는 정도의 의미에서 ‘모든 몽골 백성’ 혹은 ‘큰 몽골 백성’의 군주라고 불렀고, 이것이 후일 점차 관용화되면서 일종의 국호처럼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예케 몽골 울루스’가 처음부터 고정된 국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은 점차 국호처럼 사용되어 갔다. 《경세대전(經世大典)》「서록·제호」에는 “[[쿠빌라이 칸]]이 처음으로 대몽고(大蒙古)라는 칭호를 바꾸어 대원(大元)이라고 하였다” (世祖皇帝初易大蒙古之號而爲大元也)라는 구절이 그러한 사례이다. 샤오치칭(蕭啓慶)은 전폐(錢弊)·비문·사적(史籍)에 나타난 용례들을 검토한 결과, ‘대원’이라는 국호가 반포되기 전에는 ‘대조(大朝)’와 ‘대몽고국(大蒙古國)’이라는 두 가지 한자 국호가 사용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전자의 사용빈도가 훨씬 높았는데, 이 두 가지 명칭이 모두 ‘대원’에 의해서 대체됨으로써 사용중지된 것이라는 학설을 제시했다.<ref>「說<大朝>: 元朝建號前蒙古的漢文國號」 蒙元史新硏 (臺北, 1994), pp.23~47.</ref>이렇게 볼 때 《경세대전》의 ‘대몽고’가 ‘대몽고국’은 역시 ‘예케 몽골 울루스’의 번역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쿠빌라이 이전에는 ‘예케 몽골 울루스’가 그 한역어인 '대몽고'와 함께 하나의 고정된 국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저널 인용|저자=김호동|날짜=2006|제목=몽골제국과 '大元'|저널=역사학보|호=192|쪽=224~225}}</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