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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김영삼 정부#한미 관계}}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남한을 배제한채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김영삼과 클린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한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한에 보냈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과 더불어 [[제네바 합의]] 체결을 둘러싸고 한미간 갈등이 나타났다.<ref>{{뉴스 인용 |url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0701070823316002 |제목=MB-오바마 ‘궁합’은? |출판사= [[문화일보]] | 날짜 = 2008-11-07 }}</ref> 1996년 10월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는데(→[[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김채곤]](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김영삼정부는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0701070823316002 YS-클린턴][https://archive.is/20120707061406/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ref> [[IMF 구제금융사건]] 당시 IMF [[외환위기]]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다툼에 한국이 희생양이었다는 칼럼이 게제되기도 했다.<ref>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0100099105001&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9-09-01&officeId=00009&pageNo=5&printNo=10461&publishType=00010 앤드류 월터 칼럼]] 1999.9.1 동아일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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