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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 손병화(부), 양현자(모)
| 배우자 = 이윤영
| 자녀 =
| 형제 = 5남 2녀 중 막내
| 정당 = [[민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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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孫鶴圭, [[1947년]] [[11월 22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15·16·18대 국회의원이다.
== 생애 ==
1965년에 [[서울대학교|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투쟁이 끝난 뒤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대학 2학년 무렵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 정학을 받았다. 무기 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다시 무기 정학을 받았다. 연이어 무기 정학을 받은 손학규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나중에 복학한 그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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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손학규는 1969년 육군에 입대(군번 61006472)하여 1972년에 병장 만기 전역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손학규는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손학규는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진보 기독교 단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한다. [[해방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전태일]]로부터 충격을 받은 한국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도시산업선교를 통하여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다.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생활하던 손학규는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봄에 손학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87년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손학규는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교수 시절 동안 손학규는 진보적인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치며 [[최장집]]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하여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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