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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 손병화(부), 양현자(모)
| 배우자 = 이윤영
| 자녀 = 슬하 2녀
| 형제 = 5남 2녀 중 막내
| 정당 = [[민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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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孫鶴圭, [[1947년]] [[11월 22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15·16·18대 국회의원이다.
 
== 생애 ==
[[1947년]]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특별시]] [[금천구]])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아버지 손병화와 어머니 양현자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로 생활하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교장으로 승진했지만, 그가 4살 되던 해인 1950년 1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손학규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59년에 [[서울매동초등학교|서울매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경기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62년 [[경기고등학교|경기고]]에 입학한 손학규는 3학년 무렵에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
 
1965년에 [[서울대학교|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투쟁이 끝난 뒤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대학 2학년 무렵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 정학을 받았다. 무기 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다시 무기 정학을 받았다. 연이어 무기 정학을 받은 손학규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나중에 복학한 그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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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손학규는 1969년 육군에 입대(군번 61006472)하여 1972년에 병장 만기 전역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손학규는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손학규는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진보 기독교 단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한다. [[해방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전태일]]로부터 충격을 받은 한국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도시산업선교를 통하여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다.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생활하던 손학규는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유신독재체제]]는 박형규, 김관석, 권호경 목사 등을 구속시켰고 손학규를 검거하기 위해 현상금 200만 원에 2계급 특진을 걸었다. 손학규는 2년 동안 숨어 살며 원주의 사과 과수원, 서울의 철공소에서 일했다. 손학규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기독교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손학규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민주화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최성묵 목사 등을 만나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수사당국에 검거된다. 김해 보안대로 연행되어 48시간을 무작정 두들겨 맞고 문초를 당하던 손학규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봄에 손학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87년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손학규는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교수 시절 동안 손학규는 진보적인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치며 [[최장집]]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하여 토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