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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낙양]](洛陽) 근처에 정착하면서 자연히 중국의 내부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들은 [[팔왕의 난]] 등 [[서진]](西晉) 황족들의 권력쟁탈과 그에 따른 통치능력 상실을 보고 독립하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한에 굴복하였던 남흉노남흉노의 [[선우]](單于) [[유표 (흉노)|유표]](劉豹)의 후예인아들 유연은 서진으로부터 흉노오부대도독(匈奴五部大都督)에 임명되었으나,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자립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였다. 유연의 아버지인 [[유표 (흉노)|유표]](劉豹)는유표는 후한에 의해 유씨 성을 하사 받았는데 이를 이유로 유연은 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 (전조)|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并州) 일대를 공략했다. 유연은 한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왕실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자손은 [[성한]](成漢)으로 도망친 [[유현 (4세기)|유현]](劉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였다.
 
유연은 한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왕실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자손은 [[성한]](成漢)으로 도망친 [[유현 (4세기)|유현]](劉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였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 (전조)|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서진 회제|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영가(永嘉)의 난''') 장안(長安)에서 [[서진 민제|민제]](愍帝)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 (전조)|유찬]](劉粲)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요와 석륵이 협력하여 이를 제압하였으며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였으며즉위하였고 [[319년]]에 국호를 '''조'''(趙)로 고쳤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봉해졌으나 319년 11월, 자립하여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했다.('''후조''') 유요는 장안을 중심으로 서쪽, 석륵은 양국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각자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대립하였으나 [[328년]]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전조는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아들 [[유희 (전조)|유희]](劉煕)가 뒤를 이었으나 [[329년]] [[석호]](石虎)에 의해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전조는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