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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後趙 [[319년]]~[[351년]])는 [[오호십육국 시대]] 갈족의갈족(羯族)의 [[석륵]](石勒)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원래 '''조'''(趙)이지만, 동시대같은 유연에시대 유연(劉淵)에 의해 건국된 같은 이름의 나라가 있기때문에있기 때문에 유연의 조나라을조를 [[전조 (십육국)|전조]](前趙{혹은 조한(趙漢})라 하고, 석륵의 조나라을조를 후조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또는 석씨의 왕조이기 때문에 '''석조'''(石趙)라고 부르기도 한다.
 
== 역사 ==
후조의 시조 석륵은 원래 유연의 휘하에서 [[서진]] 토벌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유연이 죽고 그 뒤를 계승한 유총도 죽자 전조에서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석륵은 유연의 후손인 [[유요 (전조)|유요]]와 협력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유요을 황제에 즉위시켰다. 석륵은 조공이 되었고, 그후 독립하여 조왕을 칭했다.
후조의 시조 석륵은 원래 유연의 휘하에서 [[서진]](西晉) 토벌에 큰 공적을 세웠다. [[318년]], 전조의 3대 황제 유총(劉聰) 사후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석륵은 유연의 후손인 [[유요 (전조)|유요]](劉曜)와 협력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유요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임명되었으며, [[319년]] 11월에 양국(襄国)에서 자립하여 조왕을 칭했다. 석륵과 유요는 화북을 양분하여 10년 동안 대립하였다. 그러나 [[328년]],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요를 사로잡음으로써 전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329년]]에는 [[석호 (후조)|석호]](石虎)를 파견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전조를 멸망시켰다.
 
석륵과전조가 유요는 10년간 서로 겨루었으나 [[329년]]멸망하자 석륵은 전조를 멸망시켰다. 이를 계기로 석륵은 '''천왕'''(천왕天王)을 칭하고칭하였고 다음해[[330년]]에는 황제을황제에 칭했다즉위했다. [[333년]] 석륵이 죽자 태자 [[석홍]](石弘)이 즉위했으나, 석륵의 친족 [[석호 (후조)|석호334년]], 석륵의 실권을친족 빼앗고석호가 석홍을 살해하고 말았다황제에 즉위하였다. 석호는 적극적으로 외정에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후조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49년]] 석호가 죽자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 사이를 노린 석호의 양자였던 한족 [[염민]](冉閔)나라를[[350년]]에 정권을 빼앗아탈취하고 [[염위]](冉魏)를 건국했다. 이때 염민은 후조의 주요민족이던 갈족을 대량학살했다. 그후 [[석지]](石祗)가 일시적으로 후조를 부활시켰으나 얼마안가 염민에[[351년]]에 의해염민에게 멸망했다멸망당했다.
 
== 역대황제일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