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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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제는 위에서 이야기한 유이민 집단의 하나로서, 여러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부여계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강 북쪽 지역인 지금의 서울 부근의 위례(慰禮) 부락에 도읍을 정하고 부족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이들은 한강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유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십제가 진정한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은 고이왕(古爾王) 때였던 것 같다.
 
십제 왕실은 고구려의 한 갈래로서 고구려의 시조 전설과도 관련이 있으나, 한강 유역에 고구려와 같은 6부족 조직의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만큼 강력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지배 기구를 성립시킬 때, 자연히 낙랑·대방이 그 주위의 토착 사회에 준 영향력이 더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지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십제는 그 영역을 5방으로 나눠 정비할 때 고구려를 본받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즉 5방(五方)의 이름에서 부족명이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8대성(八大姓)이 백제십제 왕실과 관련이 적은 세력이라든가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관제에서도 고구려적인 성격보다 정비된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6전(六典) 조직의 모습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고요한 후진이었던나라였던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삼국의 세력 판도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가 이미 그 절정을 맞이하려던 때였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한국에서 청동기가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대동강 유역과 경주 지역이다.
 
신라는[[신라]]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박(朴)·석(昔)·김(金)씨의 시조 설화와 계보로 보아, 대략 3세기 전반에 등장한강국으로 것으로 보인다등장하였다. 신라의[[신라]]의 시조 설화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복잡하게 세가지로 나타나 있다. 이들 3성 부족이 경주 일대에 자리 잡고 조직한 초기 부족 연맹에서는 박·석 양(兩) 부족이 토착적인 김부족(金部族)보다 우세하였으므로 부족 연맹장은 미추 이사금을 제외하고는 주로 박·석 양 부족에서 교대로 선출되다가 내물 마립간을 전후하여 김씨 세습권이 확립된 것 같다.
 
신라의 6촌(六村)과 박·석·김 3부족과의 관계는 초기의 신라 부족 연맹이 박·석·김 3부족이 주체로 되어 있다가 다른 6부족과의 연맹관계로 성장하고, 그 뒤 3부족이 신라의 주체세력으로서 대연맹으로 확대되고, 고대 국가가 형성됨에 이르러서 주체부족들이 경주에서 귀족조직을 편성한 것이 6촌 설화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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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한국사 전후 순서|선사시대|삼국시대|통치시작=[[서력기원|기원]] 전후|통치종료=[[2세기|기원 후 2세기]] 중반}}-->
{{글로벌세계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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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료 = [[300년]]
}}
 
{{신라}}
 
[[분류:한국의 고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