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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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정보
'''김동삼'''(金東三, [[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의성 김씨|의성]]. [[아명|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 이름 = 김동삼
| 원래 이름 = 金東三
| 직책 = [[대한민국 임시 정부|대한 임정]]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각료|군무부]] 예하 [[대한통의부]] 상무위원장<br/>(大韓 臨政 軍務部 隸下 大韓統義府 常務委員長)
| 정당 = [[무소속]]
| 임기 = [[1922년]] [[3월 2일]] ~ [[1922년]] [[6월 18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박은식]] 대한 임정 총리
| 장관 =
| 차관 =
}}
 
'''김동삼'''(金東三, [[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은 [[한국대한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의성 김씨|의성]]. [[아명|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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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 독립 선언]]에 [[무오 독립 선언 민족대표 39인|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경, 김동삼은 [[상하이시|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ref>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ref> [[1922년]]에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 및 의장으로 참가하였으며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했다.
 
[[1937년|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ref>만해기념관, [http://www.manhae.or.kr/library2-7.htm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 - 7.심우장의 정절] {{웨이백|url=http://www.manhae.or.kr/library2-7.htm |date=20070927063036 }}</ref>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