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임시 수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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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계가 아니라 김일성은 실은 대유동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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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의 통치권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10월 21일]]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이 [[평양]]을 통치하였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38선]]을 넘자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평양]]을 공격하자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10월 25일]]에 [[중공군]]이 [[온정리 전투]]를 일으켰고, 이후에는 [[제1차 청천강 전투]]와 [[제2차 청천강 전투]]를 잇따라 일으키자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평양([[평양 철수]]: 1950.12.4)과 [[흥남]]([[흥남 철수]]: 1950.12.15-12.24)에서 잇따라 철수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평양]]에서 [[평안남도]]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10월 19일]]에는 임시수도인[[평안북도]] [[강계대유동]] 근처로 몸을 숨겼고, 중국에게 참전 요청을 하였다. 한편, [[김정일]] [[만주]] [[장춘]]으로 피신시켰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 김일성의 패주 행각] {{웨이백|url=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 |date=20140222184741 }} 1999.6.27</ref>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 등도 [[평양]]을 버린 채, 멀리 [[중화인민공화국]]의 [[하얼빈]] 내부로 들어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