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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급제 ====
권율은 40살이 되도록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사위 [[이항복]]에 의하면 나이 40이 넘도록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과거 시험]]에도 응시하지 않자, 주변에서 [[음서 제도]]로 음직에 나가는 것을 권고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과거 제도|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사실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응시한 부분도 있었는데 사위인 이항복이 [[1580년]]([[선조]] 13년)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컸다. 이항복은 가족관계에서는 사위이지만 과거 시험으로 따지면 권율보다 2년 선배가 된다. 가족들이 이항복과 비교하며 사위는 벌써 관직에 나가서 활약하고 있는데 장인어른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놀고 먹고 있는 게 말이 되냐는 타박으로 인해 권율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결심했다.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87년]](선조 20년 [[전라도]][[도사]]로 나갔다가 다시 1588년(선조 21) 예조정랑이 되고, 그해 [[9월]] [[호조]][[정랑]]을 역임했고, 이후 [[함경도]] [[경성부]][[판관]](鏡城府判官)으로 부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8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1591년]] 초 다시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1591년 9월 바로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발령받았으며, 의주목사 재직 중 당상관으로 승진했지만 1592년(선조 25) 해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