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러시아 국경 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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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의 경우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총수의 위력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1658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일선(李一善)이 “나선을 다시 토벌하려 하니 다섯 달 치의 군량을 제공하라”는 청 측의 요구를 전달했다. 조선은 군말없이 따랐다.<ref>《효종실록》 20권, 9년(1658 무술 / 청 순치(順治) 15년) 3월 3일(경자) 2번째기사</ref> 2차의 경우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모스크바군에 총과 불화살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군은 조선군을 선봉으로 세우려 했는데 조선군은 작은 자피선만 가지고 있어서 모스크바의 큰 군함에 대응할 수 없어 취소되었다. 방심하고 배에서 대기를 하던 러시아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불을 저질러 큰 혼란을 주는 방법으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조선군은 7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전사자가 나온 경로가 황당하다.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모스크바인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모스크바배에모스크바 배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그때 숨어있던 모스크바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기습공격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화장할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진 못할 망정 이국에서 태울 순 없다고 하며 근처에서 매장을 했다. [[신류]]가 인솔한 것으로 알려진 1658년 원정에 대해서는, 파병에 응했다는 것 외에는 《[[조선왕조실록]]》 상에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ref>《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제13권 효종·현종실록〉 63쪽</ref> 그러나 신류장군이 쓴 당시의 상황을 다룬 일기인 <<[[북정록 (1658년)|북정록]]>>이 남아있다. 다른 이본으로는 1869년에 신류의 6세손 호응(顥應)이 1869년(고종 6)에 펴낸 ≪통상신공실기 統相申公實記≫가 있는데 이 책에는 <북정일기 北征日記>로 되어 있으며, 이후 1980년에 현대어로 번역되어 재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신류가 이끌었던 나선정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전투상황과 청-조선 연합군의 작전, 모스크바군의 모습을 그린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7759&cid=46622&categoryId=466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 전후 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