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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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민들은 대부분 몸뚱이만 갖고 개간을 시작했기 때문에 생활상이 매우 가난했다. 신궁민들은 개간이 어려워{{refnest|group=注|개척지 대부분이 경작에 알맞은 토지가 아니었지만, 특히 어려웠던 곳이 [[죽림]]의 [[땅속줄기]]가 깔려 있던 [[토호 (나리타시)|토호]] 지역이었다.<ref name="ishige">[[#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17-20頁。</ref><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59-60頁。</ref>}} 낮에는 고촌에서 [[소작농|소작]]하여 수익을 얻고 밤에 달빛 아래에서 [[괭이]] 1개로 개간을 했다. 밥 지을 시간도 아까워서 4일치 쌀을 [[솔잎]] 따위로 쪄서 공기가 닿아 쉬는 부분을 최소화해서 먹었다. 그리고 [[전기]]도 [[수도]]도 통하지 않는 삼각형의 허술한 짚오두막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했다.{{refnest|group=注|가즈사와의 분수령에 위치한 고지대인 텐나루와 키노네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여 목욕물을 교환하기도 여의치 않았다.<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61頁。</ref>}}<ref name=":16" /><ref name=":35">[[三里塚闘争#宇沢弘文|宇沢弘文(1992)]]91-97頁。</ref><ref name="ishige" /><ref name="fukuda355867">[[#福田克彦|福田克彦(2001)]]35・58-67頁。</ref><ref>{{웹 인용|url=http://rekishidensho.jp/kikakutenji.html|title=企画展示|accessdate=2017-08-29|publisher=NAA歴史伝承委員会}}</ref><ref name="drum284">[[#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284頁。</ref><ref name=":9">[[#隅谷三喜男|隅谷三喜男(1996)]]3-5頁。</ref>
농가로서의 생존을 건 토지분쟁도 발생했다. 열악한 환경에 견디지 못한 정착민들은 속속 탈락해갔다. 결과적으로 이 땅에 남은 것은 탈락자들로부터 농지를 매입해 생계를 이을 수 있을 만큼의 농지면적을 확보한 사람들이었다.{{refnest|group=注|「와세다대학 나리타투쟁지원 모임」의 기관지 『브 나로드』에는 “나무를 베고 대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운 위에 지붕을 만든 것 같은 집에 살았습니다. 물론 비가 오면 새고, 바람이 불면 외풍이 듭니다. 겨울의 추운 밤은 밤새 불을 때며 보낸 적도 있고, 또 (토지분쟁에서) 방화를 당해 쌀과 집을 홀랑 태워먹은 적도 있고, 1년 내내 그렇게 더딘 생활을 하며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다 …… 당시의 모습을 이야기해도 아마 당신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그저 일하기만 했습니다. 내년까지 어떻게 씨앗을 남길지 벅찼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심은 작물이 열렸을 때는 정말로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우리가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텐나루 정착민의 말이 실려 있다. 투쟁 초기에 지원을 들어간 외부인들은 이런 개척민들의 고충을 듣고 그렇게 고생했으니 땅을 포기할 수 있겠냐며 투쟁의 영원성을 기대했지만 [[후쿠다 카츠히코]]는 가혹한 환경에서의 영농으로 길러진 인간불신의 정신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이외에 없다”는 말로 나타난 것으로 분석하고 지원세력은 이를 간파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65頁。</ref>。}}<ref name=":22" /><ref name="fukuda355867"/>
[[텐진미네]]・[[카야마신덴|요코보리]]・[[토요미]] 등은
== 분쟁 발생의 경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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