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극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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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관'''(趙克寬, ? ~ [[1453년]])은 조선 이조정랑 직책을 지낸 [[조선]]의 문신(文臣), 무신(武臣)이며 [[조선 단종|단종]]의 충신 즉, 삼중신 중 한명이다.
 
== 생애 ==
본관은 [[양주 조씨|양주]](楊州)이며 [[조말생]](趙末生)의 조카이다. [[조선 태종|태종]](太宗), [[조선 세종|세종]](世宗), [[조선 문종|문종]](文宗), [[조선 단종|단종]](端宗)에 걸쳐 4명의 임금을 섬겼다. [[1413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1414년]] 알성문과에 을과 급제하였으며 이어 친시문과에 을과 급제했다. [[조선 태종|태종]](太宗) 때 세자(世子) 시절의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보필했던 바 있고 정자에 이르렀으며 [[조선 세종|세종]](世宗) 때도 중용되어 우정언,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전농소윤, 사재감정, 수원부사, 평안도도사, 판사재감사, 첨지중추원사, 지형조사, 경상도관찰사, 공조참의, 우승지, 공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병조참판,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 중추원부사, 예조참판, 형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함길도관찰사를 지내다가 [[조선 문종|문종]](文宗) 때는 중추부동지사를 지냈고 이후 [[형조]][[판서]], [[대사헌]]을 지내다가 [[우찬성]]이 되었다가 김종서의 천거로 [[이조]][[판서]]로 승진이 되었다가 [[조선 단종|단종]](端宗) 때였던 [[1453년]]에 [[병조]][[판서]]에 기용되었으나 그 해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조선 세조|수양대군]](首陽大君)의 수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조선 영조|영조]](英祖) 임금 때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