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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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제문(正祖 御製文): "踰十歲選入(10살이 넘어 입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확히 1762년 입궁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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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 이후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사양했다. 이에 빈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함) 했다. 밤의 세월이 지나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효의왕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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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 ===
의빈 성씨의 상장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 동안 지낸 각종 제사 때 정조가 작성한 어제 축문을 모은 것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ref>
 
 
== 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