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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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1237년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렸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러시아인들에게는루스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바투는 [[1237년]]에 [[루시]]의 도시 [[쿠르스크]], [[벨고로드]], [[랴잔]] 등을 포함한 12개의 도시를 단 5일만에 무너뜨렸고, [[1238년]]에는 루스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 군]]을 침략했다. [[1241년]] 4월 11일 [[셔요 강]] 인근에서 일어난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러 4세]]를 무찔렀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카간|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 칸|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