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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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1237년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렸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카간|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 칸|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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