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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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 이전 분쟁의 경과 ==
=== 반대동맹 결성 ===
[[파일:SanrizukaDoumei.gif|thumb섬네일|[[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의 심볼마크.]]
[[파일:NaritaAirportSyokoFlg.jpg|thumb섬네일|반대동맹 소년행동대가 쓰던 기 ([[나리타공항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
1966년 6월 25일, [[나리타시립 산리즈카소학교]]에서 신공항설명회가 개최되어 후지쿠라 시장이 주민들에게 신공항 건설에 협조를 요청했다.<ref name="飯高春吉" /><ref name="広報なりた"/> 하지만 공항건설 용지 및 소음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리타시와 시바야마정은 공항건설 반대 일색이 되었다.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은 도미사토촌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대결할 것을 결의, 도미사토의 반대운동조직과 현지에 [[단결소옥]]을 짓고 상주하는 혁신정당 조직가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각 지역에서 반대운동단체를 조직했다.<ref name=":11" /><ref name="drum2627"/><ref name="moyu1617"/><ref name="飯高春吉"/> 「산리즈카 공항반대동맹」이 결성된 것은 신공항설명회에서 불과 3일 후인 1966년 6월 28일이었다.<ref name="広報なり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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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공항 건설에서 화근이 된 일본국 정부의 정책과 그로 인해 발생한 산리즈카 투쟁은 양측에 모두 비참하기만 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공공사업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합의형성의 노력을 하지 않은 채 힘에 의지해 사업을 진행하면 힘에 의한 저항을 낳는다”는 자숙을담아 “나리타처럼 되지 말자(成田のようにならないようにしよう )”가 표어가 되었다.<ref name="drum111112">[[#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111-112頁。</ref>
 
내륙에 공항을 건설하면 토지취득 및 소음 문제가 현저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나리타에서는 산리즈카 투쟁까지 더해져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이 교훈으로 이후 일본은 해상 및 원격지에 공항을 건설하는 경향이 커졌고, 이는 일본 공항의 편리성 저하와 비용 증가로 이어졌다.{{refnest|group=注|그러나 해상에 건설된 [[간사이 국제공항]]에도 중핵파가 공항건설공사의 견학선에 방화하는 테러사건([[요코하마요트 소형여객선 폭파사건]])을 일으킨 바 있다.<ref>立花書房編『新 警備用語辞典』立花書房、2009年、517頁。</ref>}}{{refnest|group=注|간사이공항 인공섬 건설 총 공사비가 1조 엔임을 처음 들은 세계 공항관계자는 이 막대한 건설비에 통역의 오역이 아닌지 반문하기도 했다.<ref>([[#杉浦一機|杉浦一機(1999年)]]59頁。</ref>}}<ref>谷川一巳『空港まで1時間は遠すぎる!? 』交通新聞社新書(1289-1290/2905)</ref><ref>轟木一博『空港は誰が動かしているのか』日本経済新聞出版社、2016年、455-466/2516。</ref> 또한 토지수용과 행정대집행도 신중하게 실시되도록 되었으니,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 공공사업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다.<ref name="sankei150803" /><ref name=":2" /><ref name=":24">{{Cite뉴스 news인용|title=成田開港40年 地元農家「闘争の犠牲大きすぎた」|date=2018-05-18|url=https://www.nikkei.com/article/DGXMZO30692920Y8A510C1CC1000/|accessdate=2018-05-22|publication-date=|language=ja-JP|work=日本経済新聞 電子版}}</ref>
 
[[나리타 하늘과 대지의 역사관]]은 국가공무원 종합직 초임자와 [[나리타공항회사]] 신입사원 연수에 포함되어 있다. 제2의 나리타를 만들지 않도록 산리즈카 투쟁의 교훈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라 한다.<ref name=":2" /><ref>{{Cite뉴스 news인용|title=「空と大地の歴史館」はトリビアに満ちあふれていた 「流血の日々」コーナーには闘争ヘルメットや火炎瓶も…|newspaper=産経ニュース|date=2016-02-27|author=城之内和義|url=http://www.sankei.com/premium/news/160227/prm1602270013-n1.html|accessdate=2017-03-28|publisher=産経新聞社}}</ref>
 
한편 개발에 반대하는 주민 측에서도 실력투쟁에서 주민투표 등으로 투쟁방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ref name=":24" /> 특히 장기간에 걸친 투쟁을 거쳐 이루어진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나리타 공항 문제 원탁회의는 이후 공공사업 실시 시의 모델 케이스가 되어, [[나가라강 하구둑]] 문제도 원탁회의 방식이 채택되었고, [[얀바댐]] 반대운동을 하던 주민들이 공부하러 나리타 심포지엄을 방문하는 등 일본 전국 각지에서 행해지던 [[주민운동]]의 참고사례가 되었다.<ref>[[#大和田|大和田武士 鹿野幹夫(2010年)]]138頁。</ref>
 
관제탑 점거사건 등은 일본 국외에도 크게 보도되어 산리즈카 투쟁의 모습은 [[영화]]나 [[음악]] 등 예술작품의 테마로 사용되었고, 공공사업의 실패사례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예컨대 [[서독]]에서는 나리타와 같은 시기에 계획된 [[뮌헨]]의 공항건설에 있어서 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한 철저한 연구분석을 선행했다. 1969년 공항건설ㅇ르 결정한 [[바이에른주]]정부는 20년간 259회에 이르는 [[공청회]]를 개최하여 반대파를 설득했고, 공항계획이 일부 축소되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착공 5년 후인 1992년 5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공항]]이 개항되어 오늘날 유럽 공항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ref name=":30">{{Cite web 인용|date=2009-06-15 |url=http://www.zck.or.jp/essay/2683/2683.html |title=全国町村会-地域と空港と「真の共栄」を目指して~千葉県芝山町長・相川勝重 |format=HTML |publisher=全国町村会 |accessdate=2017-08-27}}</ref><ref name=":31">[[#原口和久1|原口和久(2000年)]]131-132頁。</ref><ref name=":32">[[#杉浦一機|杉浦一機(1999年)]]174-178頁。</ref>
 
== 자료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