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고급 모바일 편집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고급 모바일 편집
217번째 줄:
미카엘은 소아시아 영토를 지키기보다는 제국 영토를 넓히는 쪽을 택해서 얼마간은 성과를 얻었다. 라틴인에게 수도가 재약탈되는 사태를 피하고자 황제는 교회로 하여금 로마에 복종하하게 강제했으나 미카엘과 제국 행정부를 증오하는 농민을 향한 임시변통책일 뿐이었다.<ref>{{harvnb|Reinert|2002|p=257}}.</ref>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 사람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노력하여 로마 제국은 제국의 영광을 돌이키려는 최후 시도했으나 [[안드로니코스 2세]]가 용병을 이용하다보니 부작용을 낳았는데 [[카탈루냐 용병대]]가 농촌을 약탈해 점차 제국 행정부는 민심을 상실했다.<ref>{{harvnb|Reinert|2002|p=261}}.</ref>
 
==== [[오스만 제국의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파일:Constantinople 1453.jpg|섬네일|위오른쪽|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5세기의 프랑스 세밀화.]]
 
224번째 줄:
[[파일:Eastern Mediterranean 1450 .svg|섬네일|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 동지중해 지도.]]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성좌 (가톨릭)|로마 교회가톨릭]] [[동방 정교회의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행정부는 교회 통합을 고려해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 시민과 성직자들은 로마 교회와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ref>{{harvnb|Runciman|1990|pp=71–72}}.</ref>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서방 지배자 대부분은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의 잔여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아무것도 돕지 않은<ref name="R84-85">{{harvnb|Runciman|1990|pp=84–85}}.</ref>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감해 벌판에 마을이 모인 정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도시가 됐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0,000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ref name="R84-86">{{harvnb|Runciman|1990|pp=84–86}}.</ref>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000여 명으로, 이 중 2,000여 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로 해자를 방어했으나<ref name="R84-85" />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ref>{{harvnb|Hindley|2004|p=300}}.</ref>
 
=== 멸망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