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페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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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 Bild 183-H25217, Henry Philippe Petain und Adolf Hitler.jpg|섬네일|왼쪽|1940년 10월 24일, 히틀러와 만나는 페탱]]
 
[[1차 대전]]의 영웅으로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페탱은, 1920~30년대 [[프랑스]]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다. 그러나제 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독일에리히 폰 만슈타인]]과의 전쟁보다는[[지헬슈니트]]에 항복이의해 낫다고무너지자, 판단한주전파인 페탱은,[[샤를 드 골]] 등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며 비판하고 새로운 수반이 되어 독일에 항복하였다. [[1940년]] [[6월 22일]] 독일과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비시 프랑스]] 수반이 되었다. 이후 비시 정부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며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 그는 패전의 원인을 나약한 좌파 탓이라고 말하며 이름뿐인 재판을 벌였다. 또한 유대인의 가슴에 별을 다는 법을 금지했다. 히틀러가 프랑스군 포로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자신을 먼저 죽이라고 말하여 이를 무마시켰다.
 
그러나 연합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직후인 [[1942년]] [[11월 11일]]에 나치가 [[안톤 작전]]이란 작전 명으로 [[비시 프랑스]]가 통치하던 프랑스 남부를 점령하자 모든 권력을 상실했다.(비시 프랑스는 명맥은 유지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