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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三黨 合黨)''' 또는 '''보수대연합'''(保守大聯合)'''은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이 합당하고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사건을 말한다.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는 괴물 여당을 탄생시킨 이 통합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3당 야합'''(三黨 野合)'''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 배경 ==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후신세력인 [[민주정의당]] (민정당) 세력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민정당이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이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요원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이다. 3당은 [[1990년]]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했으며,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 아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3당의 국회 의석 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훌쩍 넘긴다는 점, 각각 [[대구경북|TK]], [[부울경|PK]], [[호서 지방|충청]]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3당의 통합으로 사실상 호남 외의 지역들이 모두 연합하는 구도가 됐다는 점 등에서 통합 신당은 '괴물 여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 각 당의 사정 ==
=== 민주정의당 ===
보수대연합의 기원은 1986년 [[5·3 인천 사태]] 때로 돌아간다. 당시 학생 운동권의 주도로 열린 민주화 촉구 데모에서 급진적인 단체들이 반미·용공 성향의 주장들을 내놓아 반공 문화가 강하던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체질적으로 보수 정당이던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까지도 이를 규탄하고 나섰는데, 마침 강경 야당 신민당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민정당은 급진 좌파 세력을 막기 위해 보수 정당들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며 신한민주당에 보수대연합을 위한 당대당 통합을 제의했다. 민정당의 보수대연합 제의는 이후로도 꾸준히 지속됐으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보수 야권의 리더들은 민정당이 직선제 개헌 이후 사라질 정당이라고 판단해 무시한데다, 딱히 진보 진영이 정치 세력화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에 호응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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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을 정리한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협상을 펼쳤고, 또한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의 국회의원|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1935년)|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1948년)|이철]], [[노무현]] 등 8명은 독재 정부의 후신인 민정당과 함께 할 순 없다며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대한민국, 1990)|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 신민주공화당 ===
공화당은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 등 35석을 얻으면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지만 표밭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도]] 지역에서 27석 중 1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또한 같은 군사 정권 출신 정당인 민정당과 차별점이 거의 없었고, 2차례 보궐선거에서의 전패와 야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옛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의 불만 고조로 당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김종필]] 총재 본인도 이대로는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내각제 개헌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민정당, 민주당과의 합당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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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으로 인해 군사정권 잔재의 해결과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정리해야 할 과거사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작 사건의 책임을 추궁당해야 할 인사들이 거대 보수당의 중심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문제해결 노력이 미비하다는 주장이다. 여전히 부마항쟁 피해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ref>{{뉴스 인용 |저자=정민규 기자 |제목=저조한 부마항쟁 피해보상 신청... 시작부터 '삐끗'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50515 |뉴스=오마이뉴스 |날짜=2014-11-06 |확인날짜=2015-03-31}}</ref>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지만원]] 등 보수 인사들은 정부의 발표와 무관한 북한 개입론을 주장하여 국론을 분열한다는 비판도 있다. 군사정권의 폐해도 문제가 되어, [[유신헌법]]의 무효 선언을 요구하는 학계의 주장<ref>{{뉴스 인용 |저자=전병역 기자 |제목=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312145125&code=910100 |뉴스=경향신문 |날짜=2012-08-31 |확인날짜=2015-03-31}}</ref>과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보수언론과 인사들의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이 가중되는 등, 이러한 문제들이 3당 합당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비판이다.<ref>{{뉴스 인용 |저자=정민규 기자 |제목=저조한 부마항쟁 피해보상 신청... 시작부터 '삐끗'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50515 |뉴스=오마이뉴스 |날짜=2014-11-06 |확인날짜=2015-03-31}}</ref><ref>{{뉴스 인용 |저자=김윤경 기자 |제목=대한민국은 왜 ‘부마민주항쟁’을 잊었나 |url=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3930 |뉴스=부대신문 |날짜=2014-10-13 |확인날짜=2015-03-31}}</ref><ref>{{웹 인용 |url=https://518.org/ease/menu.es?mid=a10303010000 |제목=광주 청문회 |날짜=2012-03-22 |웹사이트=5.18기념재단 |확인날짜=2015-03-31}}</ref>
 
== 함께같이 보기 ==
* [[민주자유당]]
* [[DJP연합]]
* [[한나라당]]
* [[문민정부]]
* [[노태우]]
* [[지역주의]]
* [[초원복집 사건]]
 
== 각주 ==
{{각주}}
<references/>
 
[[분류:1990년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