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에 소요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top
33번째 줄:
* 호리 유키오 (1991년), "오카자키 이사오" (《우익 사전》 산료 쇼보 주식회사, 77쪽.)
* 호리 유키오 (1991년), "시마네 현청 방화사건" (《우익 사전》 산료 쇼보 주식회사, 77쪽.)
</ref>, [[1920년]] [[7월 17일]]<ref name="kouan">후지타 고로 편저, 《주요 우익 단체 간부 (전쟁 전)》({{lang|ja|藤田五郎編著「主要右翼団体幹部〔戦前の部〕}} (《공안백년사 ~폭력 추방의 족적~》({{lang|ja|公安百年史 =暴力追放の足跡=}}), 공안문제연구협회, 1978년, 666쪽.)</ref> ~ [[2006년]]<ref name="ishii">이시이 가즈마사({{lang|ja|石井一昌}}), 《[http://www.ishiikazumasa.com/roaring/2007/01252007.html 비전(非戰)의 싸움 일본의 처방전 (1) - 한신·아와지 대지진 12주기를 맞아 ({{lang|ja|非戦の闘い 日本の処方箋(1) 阪神大震災12年を迎えて}}] {{웨이백|url=http://www.ishiikazumasa.com/roaring/2007/01252007.html# |date=20090409131210 }}》[http://www.ishiikazumasa.com/roaring/index.html Roaring Wolf:::{{lang|ja|キチガイ狼が吠える!}}] {{웨이백|url=http://www.ishiikazumasa.com/roaring/index.html# |date=20090628141809 }}, 2007년 1월 25일 작성.</ref>)는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1939년]] 3월 마쓰에 중학교를 졸업한 후, 2년 간 [[만주]]의 미쓰이 물산 [[선양 시선양시|펑톈]](奉天) 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국수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42년]] 11월 일본으로 돌아와 [[승려]]가 되고자 [[일련종]] 계열의 [[릿쇼 대학]] 전문부에 입학하면서 중학교 시절의 친구였던 히로에 고분({{lang|ja|広江孤文}}, 다른 한자 표기 {{lang|ja|広江弘文}})가 가입해 있었던 국가주의 단체 [[긴노마코토무스비]]에 들어가, 국가 혁신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오카자키에게 영향을 준 서적으로 미쓰다 이와오의 《쇼와 풍운록》, 마쓰나가 모토키의 《황국체제》, 아마노 다쓰오의 《국체황도》 등이 있다.<ref name="hyakka"/><ref name="maeda456">마에다 (1965), 456쪽.</ref>
 
오카자키는 사재를 털어 도쿄 부립(府立) 고등학교 인근 (지금의 [[도쿄 도립대학]], 당시의 [[메구로 구]] 다카마에 정<ref name="maeda456"/>)에 "일심료"({{lang|ja|一心寮|잇신료}})를 세워, 거기서 매일 밤 [[다쿠쇼쿠 대학]] 2학년 사이토 나오유키 등 7 ~ 8명과 함께 정치가, [[군벌]]을 비판하는 격론을 펼쳤다. 이 때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시기로, 몇몇 세력들 사이에서 [[도조 히데키]] 내각의 타도나 암살 계획이 여러번 이루어졌다. 내대신 [[기도 고이치]]나 [[나카노 세이고]] 등도 내각총리대신·육군대신·해군대신을 쇄신하는 비밀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챈 도조가 선수를 쳐 새 총리 후보로 점지되어 있었던 [[우가키 가즈시게]]가 구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를 파악한 오카자키는 도조가 육해군의 협조를 저해하고 있어, 대화로는 상황이 진전되지 않으리라 보고 도조와 [[이치키 기토쿠로]]의 암살을 계획<ref name="uyoku"/><ref name="naka118119">나카가와 (2002), 118 ~ 119쪽.</ref>, [[와세다 대학]]의 [[교련]] 장교로부터 [[수류탄]], [[권총]]을 손에 넣어 그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카자키와는 별도로 사이토 일당이 기획하고 있었던 도조 타도 계획이 사전에 헌병대에 의해 발각되어 차례차례 계획이 밝혀지자 오카자키도 연행되었다. 오카자키는 [[1943년]] 7월, 방화살인예비·폭발물단속벌칙 위반에 따라 연행되어 [[스가모 구치소]]에서 1년 반 동안 갇힌 후, 1944년 9월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ref name="naka118119"/> 오카자키는 그 해 11월 석방되었지만, 이지마 요시오({{lang|ja|飯島与志雄}})가 결성한 존양동지회에 바로 가입했기 때문에 특별고등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고향 마쓰에로 돌아간 후에는 [[쇼와 유신]]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근로동원서용원({{lang|ja|勤労動員署傭員}})이 되었다.<ref name="maeda456"/><ref name="naka119">나카가와 (2002), 119쪽.</ref> 오카자키가 [[태평양 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계기는 근로동원서용원에서 근무한 일이었다.<ref>이노세 (1983), 193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