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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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형태=[[선거군주제]], [[세습군주제]]
|지도자_칭호='''[[칸]]''', '''[[카간]]'''(대칸)<br />1206년 ~ 1227년<br />1229년 ~ 1241년<br />1246년 ~ 1248년<br />1251년 ~ 1259년<br />1260년 ~ 1271년
|지도자_이름='''[[황금 씨족]]'''<br />[[칭기즈 칸]]<br />[[오고타이 칸]]<br />[[귀위크 칸]]<br />[[몽케 칸]]<br />[[쿠빌라이 칸]]
|입법부 = [[쿠릴타이]]
|사건 = [[칭기즈 칸]] 초원 통일<br />&nbsp;• 칭기즈 칸 붕어<br />&nbsp;• [[팍스 몽골리카]]<br />&nbsp;• 제국 4분할<br />&nbsp;• [[일 칸국|훌라구 울루스]] 붕괴<br />&nbsp;• [[차가타이 칸국|차가타이 울루스]] 동서 분열<br />&nbsp;•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 대혼란<br />&nbsp;• [[주원장]], [[명나라|명]] 건국<br />&nbsp;• 주치 울루스, [[티무르 제국|외침]]으로 급속히 쇠퇴<br />&nbsp;• [[원나라|칸 울루스]], 최종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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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예케 몽골 울루스'''({{llang|mn|{{만몽 유니코드|ᠶᠡᠬᠡ<br />ᠮᠣᠩᠭᠣᠯ<br />ᠦᠯᠦᠰ}}|Yeqe Mongɣol Ulus}})는 [[칭기즈 칸]]이 [[1206년]]에 건국한 [[몽골인]]들의 [[제국]]이다. 칭기즈 칸은 4명의 아들과 4명의 동생에게 일정한 수의 유목민들을 나누어 주어 동방과 서방에 배치시켰다. 그 결과 칭기즈 칸 자신이 관할하는 울루스, 서방과 동방에 각각 4개씩의 울루스들이 설립되었고, ‘예케 몽골 울루스’는 이들 9개의 울루스들로 구성된 복합체로 변모하게 되었다.<ref>김호동, 「몽골제국의 ‘울루스 체제’의 형성」, 동양사학연구 131 (2015), pp. 333-386</ref><ref group="주">김호동(2010),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pp.112~113., 칭기스 칸은 자신이 중앙 울루스를 직할하는 가운데 좌익(동방)에 4개 울루스, 우익(서방)에 4개 울루스를 배치하여 몽골제국의 기본 구조를 완성했다. 그는 몽골리아를 중심으로 서쪽 알타이산 초원 지역을 아들들에게, 동쪽 흥안령 지역을 [[주치 카사르]](1164?-1219?) 이하 동생들에게 분봉했다. 장남 [[주치]](1177?-1225) 가문은 가장 멀리 알타이산에서 이르티시강 유역(킵착인킵차크인 거주지), [[차가타이]](1183-1241)는 알타이산에서 주변 츄강 유역(옛 [[서요|카라 키타이]] 영지), 그리고 [[우구데이]](1186-1241)는 알타이산에서 우룽구강 일대(나이만의 옛 땅), 막내아들인 [[톨루이]](1193-1232)는 몽골의 ‘말자상속제’에 따라 제국의 중심부인 몽골리아 지역을 분봉받았다.
각 분봉받았다. 막내아들 [[톨루이]](1193-1232)는 몽골의 ‘말자상속제’에 따라 칭기스 칸이 영유하는 몽골리아가 약속되었다.</ref>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튀르크에 속해 있던 몽골인들이 건국한 국가들이다.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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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칭기즈 칸]] ===
1206년 [[칭기즈 칸|테무친]]은 [[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오논 강에서 부족 연합의 군장인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대제국이 시작되었다.
 
제국 건국 이전 [[칭기즈 칸은칸]]은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 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군인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정복 전쟁의 야심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1219년부터는 서아시아에 원정해 [[호라즘]]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편, [[캅카스]]를 함락해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빼앗고 1225년 귀환했다. 아시아 내륙 지방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의 영토를 현저히 확대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 제국을 정벌하던 중 1227년 진 중에서 전사했다. 칭기즈 칸 사후 당시 몽골 제국의 영향력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 평원에 접해 있었다. 또한 제국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 [[오고타이 칸]] ===
칭기즈 칸이 [[서하]] 제국과 전쟁 하던 중 전사한 후 2대 황제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의 잔존 기병대, 보병대와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년에는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루스와[[키예프 루스]]와 중앙 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부르갈인들의 불가르]]인들의 제국은 1~2년 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키예프 루스]]의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 무렵 루스여러 중부와소공국으로 북부는분열되어 도시있던 국가와[[[키예프 독립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루스]]는 몽골군에몽골의 차례로침입으로 함락되어갔다붕괴하였다.
 
[[발트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루스의 무역도시인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몇몇 도시가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일부를 정벌했으며 전위 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 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 근처 발슈타트에서 수부타이의 몽골군에게 [[1242년]] [[4월 9일]] 궤멸에 가까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몽골군은 독일 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사조 강 유역에서 완파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의 몽골 지배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국토가 황폐화되었다(→[[헝가리의 역사]], [[헝가리의 대외 관계]]).
 
[[발트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루스의[[노브고로드 무역도시인공화국]]의 수도였던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몇몇[[루스인]]들의 일부 도시가도시는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 왕국]]의 일부를 정벌했으며 전위 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의[[폴란드 왕국]]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 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 근처 발슈타트에서 수부타이의 몽골군에게 [[1242년]] [[4월 9일]] 궤멸에 가까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몽골군은 독일 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사조 강 유역에서 완파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의[[헝가리 왕국]]에서의 몽골 지배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국토가 황폐화되었다(→[[헝가리의 역사]], [[헝가리의 대외 관계]]).
한편 그에 앞서 몽골군은 이란·그루지아·아르메니아에서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
 
=== 귀위크 칸 ===
오고타이 칸의 전사 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몽골군 군사령관들이 모여서 전쟁과 황제 선출에 관해서 회의를 하는 군사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의견 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 칸의 제자 [[귀위크 칸|귀위크]]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246년 오고타이 칸의 아들 귀위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3년 만에 원정길에서 전사하고, 다시 군사 회의인 쿠릴타이가[[쿠릴타이]]가 계속되었다.
 
=== 몽케 칸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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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i Ön Yeqe Mongghol Ulus.jpg|300px|섬네일|오른쪽|몽골 제국의 영토와 속령 그리고 종속국들의 지도.]]
 
몽골 황제(대칸)의 궁정에는 케시크라는[[케식]]이라는 측근 관료가 있었는데, 이들은 황제의 친위대를 맡는 동시에 케시크테이라[[케식텐]]이라 불리는 가정기관을 형성하였다. 케시크는케식은 코르치(화살통지기), 우르두치(큰칼잡이), 시바우치(매부리), 비치크치(서기), 바르가치(문지기), 바울치(요리사), 다라치(술 담당), 우라치(수레몰이), 모리치(말치기), 스쿨치(옷 담당), 테메치(낙타치기), 코니치(양치기) 등 다양한 직제로 나뉘어 노얀(귀족)의 자녀와 대칸에게 개인적으로 기용된 자들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가정제도는 다른 주치 가문이나 툴루이 가문에도 존재하였으며, 이들 직종을 맡았던 케시크들은케식텐들은 각 왕가의 당주격인 칸을 가까이서 섬기며 우르스의 여러 일들을 맡았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 연합 국가였지만 중앙 정부와 점령지 통치 기관은 황제 직할지배 아래 두는 것으로 이들은 케시크케식 출신에 의해 형성된. 중앙에서는 케시크케식 내의 몽골 귀족이 임명한 쟈르구치(단사관)이 놓여 행정 실무와 소송을 담당했다. 그 정점에 서는 것이 대단사관(예케・쟈루그치)으로 최초의 대단사관은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의 양자가 되었던 시기 쿠툭이 맡았다. 지방에서는 대부분이 몽골인으로 임명되는 다루가치(감독관)이 도시마다 놓여 점령지 통치를 관장했다.
 
그리고 실무에서 쟈르구치나 다루가치를 도와 말단 문서 및 재무 행정을 맡아보는 중요한 직책이 비치크치(서기)였다. 비치크치는 현지 점령지의 언어에 통달한 자로 한족이나 서하, 거란, 여진, 고려 등은 한인, 위구르인, 무슬림(이슬람교도) 등의 색목인 출신자가 다수 참가하였다.
 
몽골 황제인 칸을 섬기는 비치크치들은 케시크의케식의 일원으로서 군주의 측근에서 피지배자에게 내리는 명령인 칙지(쟐리그)를 기록하고 번역하여 문서로 발급하였다. 중앙에서 나온 명령은 쟈무치라 불리는 역참제도에 따라 하루에 100km 이상의 속도로 제국의 간선로를 따라 신속하게 제국 구석구석에 미칠 수 있었다.
 
이어 몽골 제국은 황제뿐 아니라 황족과 귀족, 황후의 오르도에도 케시크에 준하는 조직이 있어서 그 장교와 영민, 출입하는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그들의 소궁정에도 황제와 같은 행정기관이 생겨나고, 우게(말)라 불리는 명령을 내릴 권력을 지녔다. 14세기 초까지 왕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분할된 정주지대의 도시나 농촌에 자신의 궁정에서 다루가치와 징세관을 보내 그 지방의 행정에 관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