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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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성이의중립 필요|날짜=2020-04-13}}{{출처 필요|날짜=2020-03-22}}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군인 교육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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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ref>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若隣兵投於我國遠相'''興武大王'''</ref> 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거나 [[가락국]] 뿐만 아니라 [[반파국]], [[안라국]] 등 가야 연맹체의 특정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고 쓰여 있다.
*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7년]]까지 사이에 [[고구려]]가 벌인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분은 비문이 파손되고 "海"의 경우 "每"를 고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비문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인용문|'''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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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INTERNATIONAL/Article.asp?aid=20081221001849&subctg1=&subctg2= 한·일 역사공동위 결론…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없다"],《세계일보》, 2008.12.21</ref>
 
*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서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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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배의 운송 능력이 군인 25명, 말 2~3필 정도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할 만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에 전달할 수 없다.
*남조(南朝)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해당 칭호는 별 의미가 없음이 중국 기사로 확인된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을 받았는데, 백제왕은 420년에 그보다 두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 두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을 받았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없던 신라를 빼고, 왜왕이 중국왕조들에게서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 [[칠지도]] 앞면의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음을 뜻하고, 뒷면에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명(下命)하는 형태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현대의 학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