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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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콜람파디우스는 언어에 능숙하여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 편집시 [[히브리어]] 자문을 도왔다.1522년에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 시의회의 요청으로 이사야서를 설교하기 위해 바젤로 돌아갔다.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요하네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창세기 설교 시리즈를 포함한 몇몇 작품들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 작품들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들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크리소스톰]]에 의해서 옹호된 성경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주해 방법을 채택하였다. 또한 이미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던 그는 바젤의 개혁 운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그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자, 1525년에는 바젤 대학교의 성경학 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1528년에 잠시 동안 베른에 체류하였는데, 그곳에서 [[마르틴 부서|부처]]와 쯔빙글리 그리고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를 도와서 [[베른]]의 개혁을 일구어 내는 데에 일조하였다.<ref>정성구, 『개혁주의 인명사전』 (서울: 총신대학교출판사, 2001), 521</ref> 외콜람파디우스가 [[개혁 교회|개혁교회]]에 끼친 가장 큰 신학적 영향은 치리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는 1518년에 바젤 주교관구의 치리권을 설명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치리에 호소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교회의 치리는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설교와 저술에서 공적인 죄에 대한 “공적인 치리” 혹은 “출교”의 근거와 당위성에 대한 설명은 점증하게 되었고, 따라서 1526년 바젤 예배규정에 출교가 중요하게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ref>황대우, 『칼빈과 개혁주의』 (경기: 깔뱅, 2009), 431-32</ref>
 
== 함께보기같이 보기 ==
*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
* [[스위스 종교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