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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은 [[고구려]]의 토성이다. 안시성은토성(土城)이며, [[안시성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랴오닝 성]] [[하이청]]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정사에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시성 전투==
{{본문|안시성 전투}}
보장왕 4년([[645년]]) 고구려와 당 사이에 벌어진 전쟁 중 안시성에서 있었던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다.
 
고구려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수나라에[[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는[[당나라]]는 숙적(宿敵)인 고구려의[[고구려]]의 정벌에 나섰다. [[이세적]](李世勣)·[[장량 (당나라)|장량]](張亮) 등이 지휘하는 당의 대군은 [[보장왕]] 4년(645년) 봄 [[랴오 하|요수]](遼水)를 건너 현도성에[[현도성]]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이 일대의 성을 굳게 지키며 대항했으나, 당은 [[개모성]](蓋牟城)·[[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백암성]] 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공격하여 왔다. 양쪽은 온갖 전략으로 공방전을 계속했다. 고구려 군대의 사기는 날로 올라가고 용감무쌍해졌으나, 당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지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한편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정사에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구려 군대의 사기는 날로 올라가고 용감무쌍해졌으나 당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지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분류:중국의 성]]